예전에는 ‘전야제’격인 섣달그믐날의 행사가 다채로웠다. 먼저 ‘절굿’이라 하여 신나는 풍물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악귀와 재액을 쫓고 명복을 비는 망년굿을 했다. 온 마을에 굿판을 벌였으니 흥도 있고 낭만적이다.
또 다른 ‘이벤트’가 새 장승을 세우는 일이다. 목수는 자귀질을 하고 장정들은 장승을 깎고 노인들은 담뱃대로 이런 저런 조언을 하며 아이들은 곁가지로 만드는 팽이를 받기위해 줄을 서는 정겨운 풍경이 벌어진다.
장승이 다 세워지면 마을 입구에다 골매기 금줄을 쳤다. 잡귀를 쫓고 새해 서기(瑞氣)를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한마당 축제가 끝나면 한 해 동안 어른들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묵은”세배를 올렸다.
선조들은 설날을 정월 초하루라 했다. 다른 달은 2월, 3월하면서 1월은 정월이라 해서 꼭 바를 정(正)자를 썼다. 정월에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모든 행신범절도 바로 하며 첫 단추를 잘 끼우라는 의미다.
설은 1년 중 가장 깨끗한 날이므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순결과 장수의 상징이라는 떡국을 함께 먹고 건강과 행복을 비는 넉넉한 덕담도 나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린다. 예절은 사람다운 기본 도리이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예절감각을 새해 어른들에게 올리는 세배로 자연스럽게 길렀다.
세배를 올릴 때 합장하는 손의 위치도 기억해야 한다. 살아계시는 어른에게 절할 때는 왼손이 위로 올리고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절은 오른손이 위에 올라가야 한다. 그 까닭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오른손은 양이며 왼손은 음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어른에게 올리는 절을 할 때는 왼손의 기(氣)가 음이므로 손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고 밑에 있는 오른 손의 기운은 양이므로 위로 올라와 손에서 기(氣)가 합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돌아가신 분에게는 기운이 하늘과 땅으로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다. 케케묵은 이야기 같지만 그 뜻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남자의 경우이기 때문에 여자의 손은 그 위치가 반대인 것은 당연하다.
설 ‘이벤트’는 정초로 이어진다. 이집 저집에서 널뛰는 소리가 요란했고 이일은 할머니가 주관한다. 겨우내 온돌방에 갇혀 응어리진 정신과 육신을 풀어주는 운동인 것이다. 보다 깊은 속셈은 여자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인 오금을 죄는 스트레칭이다. 오금을 죌 수 없는 여자는 성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고 출산에도 지장이 있으므로 여자구실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널뛰기는 고전판 성교육인 셈이다. 자연스럽게 담 넘어 총각도 볼 수 있게 눈감아주는 것이니 조상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정초의 합동게임은 윷놀이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고 담장 넘어 온통 웃음바다로 넘치니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다.
그러나 그냥 희희낙락이 아니라 깊은 뜻이 있다. ‘도’는 돼지자리다. 돼지는 분수에 맞지 않는 탐욕과 빈둥거리기를 좋아한다. 또한 약자에게 한없이 거만하고 강자에겐 비굴해지는 개를 닮은 소인배가 ‘개’자리다. 최소한 이런 개와 돼지 같은 인간은 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로 김빠지는 점수를 주고 가는 걸음도 제일 더디게 한 것이다.
‘걸’자리는 염소의 뿔로 상징되며 아집을 뜻한다. 고집불통에 패거리를 만드는 식자층에 대한 경고다. 선조들은 여기까지를 아리랑 고개라 했다. 나태와 탐욕, 편견과 비굴, 아집과 붕당의식에서 벗어날 때 참사람으로 가는 도(道)의 문턱으로 보았다. 민요 아리랑 고개의 함의(含意)도 같다.
윷과 모를 하면 한 번 더 던질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것도 이런 보상심리다. ‘윷’은 우두(牛頭)머리가 되는 소이다. 우두머리는 강자요 정상이지만 힘만으로는 부족함으로 소의 자리를 넘어서는 득도(得道)의 경지가 ‘모’이다. 상징동물은 말(馬)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말(言)도 되니 곧 성인을 뜻한다.
윷놀이는 가축들의 습성을 은유한 우리민족의 오래된 주기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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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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