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투의 역사
우리조상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혼상제(冠婚喪祭)!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왜 관례에서 상투를 틀고 쪽을 진 것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상투의 역사를 추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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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저총의 씨름도 / 신라의 상투를 튼 기마인물상 |
고구려의 상투는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상투를 튼 모습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상투는 토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토우와 기마인물상의 머리 모양이 뾰족한 상투를 하고 있는 것에서 신라의 상투를 확인할 수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 및 『진서』 등에서는 고대 한민족이 상투를 틀어 올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어 상투를 틀어 내놓으며...”(大率皆魁頭露紒) (『후한서』권85 「동이열전」<한조韓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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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문화의 옥고(玉箍) |
그런데 단군조선에서도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연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도망치자 위만도 망명하고자 천여 명의 무리를 모은 다음 머리에 상투를 틀어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 밖으로 나갔다.”(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사기』「조선열전」)
위만은 연(燕)왕 노관(盧綰)의 부하로 북부여 해모수 45(BCE 195)년에 ‘번조선’의 74대 마지막 왕 기준(BCE 221~BCE 194)에게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간교한 술책으로써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86년간의 위만조선(BCE 194~BCE 108)을 세운 인물이다. 이 기록에서 위만이 ‘동이족인 것처럼 위장하기위해 상투를 틀고 번조선 지역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때 이미 우리 민족이 상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나 신라, 백제의 머리모양이 단군조선에서 계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투는 단군조선에서 처음 시작된 것일까? 환국과 배달의 문화로 밝혀진 홍산문화! 이곳에서 환단시대의 머리모양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유적의 우하량 1호 적석총 M4와 M15유적에서 출토된 옥고(玉箍, 옥으로 만든 머리덮개)가 그것으로, 발굴자들은 옥고의 출토위치가 두개골 아래 혹은 정수 리 아래쪽일 것이라 밝히며 속발구(束髮具,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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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나라 부호묘의 옥인상 |
묶는 도구)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고 옥고가 이를 덮었을 때 무게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머리꽂이로 고정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시대의 틀어 올린 머리와 관모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형성된 것임을 뜻한다.(고조선과 달리 상왕조시대의 남자들은 머리를 정수리에서 짧게 땋아 내려뜨리거나 머리 전체를 말아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시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변이나 절풍과 같이 상투머리만을 덮는 폭이 좁고 높이가 있는 모자를 썼던 것은 홍산문화시대에 형성되어 널리 정형화된 머리양식이 계승된 것이다. 고조선 멸망 후 열국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상투머리에 변이나 절풍을 많이 썼는데, 이는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출토된 유물로부터 확인된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을 썼는데, 책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린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그 모양이 변과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고구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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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신라, 백제 사신의 의복과 관모 |
이상의 내용으로 고조선 이전 시기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리꽂이를 사용해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했고, 홍산문화시기에는 상투 위에 옥고 등을 씌워 우아한 머리양식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조선 시대로 오면 일반적으로 옥고 대신 상투머리를 덮을 수 있도록 폭이 넓지 않고 높이가 있는 변이나 절풍과 같은 모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 만달어진 금관과 금동관 등도 모두 고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상투머리와 그 위에 썼던 절풍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상투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이전의 홍산문화 시기부터 발생하여 계승된 머리모양으로 타민족과 구별되는 한민족의 상징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왜 상고시대 이후로 수천 년 동안 상투를 고수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단서를 중국 한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금을 세운 여진족과 원을 세운 몽골족은 우리민족과 달리 역사적으로 변발을 고수해왔다. 변발(辮髮)은 후두부(後頭部)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린 것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은 한족에게 변발을 철저하게 강요하였다. 청의 세조(世祖)가 1644년 체두변발령(剃頭髮令), 즉 치발령(髮令)을 내려 한족에게 “변발을 거부하는 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만주족의 변발을 강제한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땋아 올려 관(冠)을 쓰는 것을 의관(衣冠)의 풍속으로 여긴 한족(漢族)은 맹렬한 반발과 저항을 했다. 이는 단순한 두발 형태의 문제가 아닌 전통의 사활로 여겼기 때문으로, 일제가 단발령을 강제했을 때 우리민족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지금과는 달리 고대뿐만 아니라 근세까지 머리모양은 족속을 구분하거나 타민족을 복속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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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발∥◥영화 ‘대장 부리바(Taras Bulba, 1962)에서 코사크족으로 분한 율 브리너.
변발을 한 모습에서 코사크족이 북방 기마민족임을 알 수 있다.
[ 글 : STB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박하영 전문기자 p-hayo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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