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를 보는 사고방식에 굴절된 시각이 진실된 모습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사를 이야기하면 으레 삼천리금수강산을 연상하게 된다.
이 같은 그릇된 반도사관은 왜정치하에서 민족사를 말살시키기 위해 교묘하게 조작된 식민정책의 슬픈 유산이다.
해방 후 오늘까지 우리는 은연 중 이러한 역사관에 젖어 알게 모르게 고정관념화한 편견의 “틀”속에 갇혀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만 살아온 것이 아니라 만주지방과 황하 유역까지 삶의 본거지로 삼았었다.
고조선은 물론 부여도 고구려도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되었고 발해국도 7세기말에서 10세기 초에 망할 때까지 만주에 존재했었다.
우리민족은 3000년 이상을 지금의 만주 땅에서 살았다. 적어도 이시기의 만주는 중국역사와는 먼 거리에 있는 이국땅이었다. 이미 남의 나라 영토가 된 만주 이야기가 듣기 따라서는 공허한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영토가 아니라 고토(古土)와 함께 잃어버린 민족정기의 르네상스에 있다.
우리 고대사를 지금처럼 머리 잘린 생선 꼴로 방치하고서는 그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 교과서에도 3000년의 고대사는 앞부분에 한두 마디로 얼버무린 채 지나치고 있기 때문에 문화도 문명도 없었던 황무지로 공중 분해시켜 놓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라고 자랑하고 있다.
원형을 잃어버린 민족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민족의 기상과 얼을 찾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 일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문명학적 잣대는 “토기”의 발명으로 꼽는다.
당시에 진흙으로 빚은 토기를 열에 구워 화학적 반응을 응용하는 기술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토기를 만드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아울러 토기의 발명은 곧 떠돌아다니던 인간이 주거지가 생기고 그곳으로 자연을 끌어들이는 계기를 만드는 삶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운 사고체계(paradigm)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 황하에 이르기까지 발굴되는 대표적인 토기유형은 “빗살무늬토기”였다. 그래서 우리 원시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 이름 짓고 있다. 토기 표면에 머리빗 같은 것으로 긁거나 핀 같은 것으로 꼭꼭 찍어서 무늬를 그렸다.
빗살무늬토기는 멀리 시베리아와 유럽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시베리아에서 몽고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렀다고 지금까지 믿어왔다. 그러나 최근 우리 고고학자들이 조사 분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러한 종래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의 추정 연대는 대략 6000 여 년 전의 것으로 동유럽이나 시베리아의 것보다 2000년이나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의 동질성이 뚜렷하여 두 지역의 동일문화권이 확인되고 있다. 반면, 시베리아와 유럽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방법이나 그릇 모양이 현저히 다르다는 논증이 나와 있기 때문에 민족동질성 문제는 더욱 명료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빗살무늬 토기는 당시 남쪽지방인 중동, 태국, 중국 등의 채색 토기와 구별되고 있는 점도 동북아시아 북방계열의 문화권으로서의 고유한 특색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빗살무늬토기 문화는 우리 고대사의 찬란한 문화궤적이지만 토기를 만든 선조들의 문화적 우월성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를 고집하며 민족문화의 독특성을 지켰던 한민족은 우람한 “고인돌 문화”를 다시 창조해 낸다.
뛰어난 조상들의 건축기술이 과학기술사적 측면에서 재조명되어져야 하지만 이 또한 버려진 기왓장처럼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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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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