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창설 멤버. 일본군 40만과 최후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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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 선생의 유언
1901년 6월 24일 출생
1919년 밀양 지역 3.1혁명 조직
1919년 11월 의열단 창립 멤버
1921년 의열투쟁 중 체포, 7년형 선고
1932년 10월 20일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 입교, 제 1기 졸업
1932년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 결성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및 총사령관 역임
1942년 40만 명의 일본군 vs 3000명의 조선의용군 전투 순국(6.3)
윤세주 선생은 의열단의 강령 및 목표에 따라 조선총독부 등 일제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 투척 지원자를 물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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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고 열정적이었던 19세의 선생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서 계획을 모의하던 중 정보가 누설되어 국내 동지 50여 명과 함께 체포됩니다. 선생은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버티어냈고 1927년에 출옥합니다.
이후 신문사 기자, 회사 사장 등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독립운동과는 더 이상 관련 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지내다 1932년 여름에 다시 중국 난징으로 떠납니다. 이 시기 선생은 독립운동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수립했고, 어떻게 하면 의열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으로 싸웠으나 이제는 혁명적인 인생 철학과 과학적 혁명 이론으로 무장하여 실수나 실패 없는 승리를 위한 혁명운동을 하기로 다짐합니다. 1932년 10월, 선생은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에 입교하여 제1기로 졸업합니다. 당시 해외 독립군 단체들은 노선이 통일되지 않아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입장이었습니다.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며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을 참가시켜 통일연맹을 결성했습니다.
윤세주 선생은 통일연맹에서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윤기섭 선생등과 함께 고위 간부로 선출되었고 그토록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통합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민족혁명당이 일본군에 비해 무력으로 위협받을 수 있는 점을 지적하며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지휘하는 계획을 제안합니다. 선생은 실제로 ‘조선의용대’ 핵심 부서에서 공작활동을 벌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일제의 편이 되어갔으며, 독립운동의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선생은 이 시기에 이르렀을 때 말로만 고민하지 않고 직접 총과 칼을 잡고 나섭니다. 직접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여한 것입니다. 수많은 전투, 그리고 그렇게 키워진 한국과 중국군의 동맹은 안타깝게도 훗날 한국전쟁 시 중국이 북한군을 ‘의리’라는 이름으로 지원해주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의 연합작전으로 일본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당시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의열단과 광복군 출신들이 북한에 체류하게 되는데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한 전력을 보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병사나 간부들의 휴가 여부를 떠나서도 이미 이길 수 없는 전력과 전투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윤세주 선생은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팔로군’과 함께 가장 많은 전투를 치릅니다.
선생은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전투에서 선생이 직접 총을 들고 가장 앞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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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일본군 4만 명이 선생을 붙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선생의 부대가 주둔해 있던 태행산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4만 명으로 의열단 창시자 중 한 명인 윤세주 선생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5월에 이르러서는 일본군 20개 사단을 총출동시켜 40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해옵니다.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윤세주 선생의 조선의용군 병력이 놀랍게도 3~4천 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선생이 어느 정도의 존재감과 능력을 가진 지휘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5월 29일, 운명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윤세주 선생과 선생의 부대원들. 선생은 마지막까지 탈출로를 확보하려고 노력했고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였으며 명령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던 현장에서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기습 선제공격을 벌였고, 나머지 대원들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때 기습 선제공격을 한 소수정예 요원에 윤세주 선생도 있었습니다. 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한 조선의용군은 탈출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윤세주 선생은 작전도중 적탄에 맞아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총탄을 맞은 그 자리에서 3일 동안 치료도 못한 채 정신력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3일 후 선생을 찾으러 목숨을 걸고 현장에 돌아온 부하들에게 선생은 이런 말을 남기고 서거하셨습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동지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을 때 선생의 나이 41세였습니다. 윤세주 선생, 장군이라 불리는 독립운동가가 서거하셨을 때 그의 부대원 모두가 통곡했습니다. 그의 죽마고우이자 의열단을 함께 만든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도 도무지 감정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지가 후손에게 이어져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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