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마흔여덟번째'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수직주의적 예문화 전통 - 잘 오셨어요

소통크기를 작게 만드는 요소들은 한없이 많다. 표현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이를 뒤흔드는 힘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 식민지와 분단, 지식정보시대의 시간 공간 개념의 급변, 넘치는 복제물(시뮬라크르)들, 대중매체 속의 속도와 거짓 내지 비현실, 주입식 교육이나 수직주의 문화 등은 ‘작은 소통문화’의 생산과 재생산에 하나의 방식으로 연결된다.

2장에서 우리사회의 작아진 소통크기, 만남크기의 모습들을 드러내려 했는데, 이 장에서는 그 원인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모습’ 속에 ‘원인’도, 또 원인 속에 모습도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주로 묻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1절은 오랜 기간 뿌리내려온 한국사회의 수직주의적 예문화 전통에서 작은 소통문화의 한 중요한 원인을 찾아본다. 한 사회의 관습과 문화전통은 사람들의 생각방식, 가치관, 느낌 방식, 행동방식을 규정하고 소통문화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이다.

예(禮)는 ‘만남의 바른 법’ - 몇 자 더 보태어 - ‘만남과 소통의 바른 법’이라 할 수 있다. 태고 때 발생한 예의 근원도 사람들의 ‘작은 삶의 크기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노력’에서 찾아진다.

태고 때부터 가뭄과 홍수나 질병 등은 ‘사는 존재’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사람들의 삶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당시의 자연재해나 질병은 사람의 힘이나 과학기술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힘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신(神)적 존재들을 생각해내고, 이들과 일정한 방식으로 만나고 소통하면서 이들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런 만남과 소통의 일정한 절차와 방식이 최초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禮’(예도 예) 자는 원래 ‘豊’(예도 예, 풍성 풍) 자에서 나왔다. ‘豊’(예) 자는 그릇 위에 풍성하게 올린 음식을 그린 것이다. 예는 초인간적인 능력의 존재에게 바치는 예물 내지는 바치는 일 자체를 지시했다. 후에 이런 뜻을 명료화하기 위해, ‘弟’(아우 제) 자에 ‘心’(마음 심) 자가 더 붙어 ‘悌’(공손 제) 자가 되듯이, 여기에 ‘示’(보일 시) 자가 더 붙어 ‘禮’(예도 예)로 된다.

‘神’(신), ‘祈禱’(기도), ‘祭祀’(제사), ‘祖’(조), ‘禍福’(화복), ‘祥’(상), ‘祚’(조), ‘社稷’(사직) 등 수 많은 단어들이 ‘示’(보일 시) 자와 함께, 신적인 존재(神, 祖, 社稷), 이들과의 만남과 소통의 방식(祈禱, 祭祀), 이들이 좌우하는 화복(禍, 福, 祥, 祚) 등을 가리킨다.

인력으로는 풀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신(神)적 존재들에게 가장 정중하고 경외하는 마음가짐으로,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치면서 ‘살려 달라’는 혹은 ‘복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예를 들어, 비를 그치게 해달라거나 내리게 해달라는 바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제례는 사상가나 제사장, 정치가들의 노력 내지 활동과 더불어 사회적 삶 전체로 퍼지면서, 관습이나 제도로 혹은 당위나 의미로 자리를 잡게 된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신분제의 정착으로, 이론의 예문화질서와 현실의 사회화질서는 서로를 지지해주는 관계로 되어간다. 여기까지의 논리는 의례(儀禮, ritual, rite)라는 이름으로 세계사 일반에도 기본적으로는 해당된다 할 것이다.

유교의 전래와 함께 이 땅에도 유교의 예문화가 사상이나 제도, 일상의 삶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며, 사회적 삶 전체의 모체(母體, matrix)로서 자리잡아왔다. 시간이 흘러도 암암리에, 이런 전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하면서 살아 숨 쉰다.

예는 나를 낮추어 보이고(示) 남을 올려 보는(視) 사람 만남의 자세라 했다. 예는 만남에서 상대나 남, 다름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정신을 밖으로 표출하여 보이는 방법이나 절차 혹은 그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에는 내모(內貌)와 외모(外貌)가 함께한다. 이를 예모(禮貌)라 할 것이다.

이렇게 속과 겉이 함께하지만, 이 둘은 꼭 합치될 수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합치되어서도 안 된다. 손님은 밥맛이 없어도 있다고 하고, 손님을 맞는 주인은 시간이 없어도 있다며 ‘잘 오셨어요.’고 하면서 서로를 배려함이 또한 예이다.

아프리카 토고(Togo)에 ‘거짓말쟁이만이 시간이 없다고 한다네. 의자 하나를 끄집어 앉게.’란 속담이 있다. 이런 배려는 원활한 소통과 ‘맛있는 함께’의 기본 전제라 할 것이다. 이런 배려에는 동시에 겉-짓과 허례, 따로와 군림이 함께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