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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사이토와 데라우치

‘한’민족말살을 획책하다 2

  

사이토와 데라우치

 조선을 암흑시대로 이끈 일본인 총독은 여덟 사람이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총독은 초대 데라우치와 3대와 5대를 연임한 사이토이다.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악명이 높았던 자로 일본 육군대신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조선총독부 안에 취조국(取調局)이란 부서를 설치해 무단정치를 강행한다. 이상시의 저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 그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명분상으로는 조선통치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위해 조선의 역사와 관습, 제도를 조사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우리역사 중 고대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강행하는데 있었다.

 데라우치 총독은 첫 조치로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취조국으로 하여금 일본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여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앞세워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사서(史書)는 물론 서울 종로일대의 서점들을 비롯해 방방곡곡에 있던 사서까지 탈취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향교, 서당, 고가, 권문세가까지 급습해 거기에 소장되어 내려오던 단군실사를 편찬, 저술한 세칭 ‘도가사서(道家史書)’를 비롯해 각종 우리민족 고유한 사서류(史書類)에 해당하는 상고사 관련 책들과 기타 애국서적들도 모두 압수했다.
 
 또한 신채호가 쓴 ‘을지문덕’등 우리나라 위인전을 기록한 저서들도 모두 강탈했다. 이렇게 탈취한 고대사서 약 51종 20여만 권을 모두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울러 관보에다 이런 서적들의 판매를 금지하고 그 소지자와 책을 읽는 사람까지 처벌한다고 공시하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공개적으로 소위 ‘조선사 편찬사업’을 시작한 1916년 1월부터 다시 ‘사료수집’이란 명목으로 우리사서들을 탈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만행은 3년 동안 다시 계속되었다.

 이때 생전 처음 보는 진귀한 고대 사서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들의 빈약한 실력으로서는 내용을 해득할 수 없어 조선인 사학자의 힘을 빌어야 했지만 우리사학자들은 협력하지 않았다.

 1919년 한민족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는 3, 1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일제는 총검과 무차별 학살로 진압하고 한민족을 무력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해 8월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다. 겉으로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조선일보 발간을 허용하는 등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교활한 교육정책이 시행되었다. 당시 사이토 총독이 교육정책을 발표하면서 주장했던 연설을 보면 그 속셈을 불을 보듯 알 수 있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 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 악행들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체일 것이다”

 이 연설문은 ‘한’민족말살 정책을 웅변으로 대변한다. 사이토는 데라우치가 강행했던 고대 사서를 다시 강제 수탈한다. 고대사서의 소장자들이 깊이 감추게 되자. 소위 ‘빌려보겠다(借覽證)’는 형식을 취했다.

 그 후 사이토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다시 신설하고 편찬진용을 재정비하였지만 성과가 여의치 않자, 총독은 다시 ‘사료탐방내규(史料探訪內規)’를 제정한다.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조선 8도에 남아있는 모든 사료와 일본과 만주, 대마도까지 관련 사료를 모조리 몰수하였다.

 1937년 말까지 15년간이나 계속되었으니 우리고대사 사료 탈취와 상고사말살에 대한 끈질긴 집념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료는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만을 서술한 ‘삼국사기’와 상고사 부분 중 단군을 설화로 기술한 ‘삼국유사’이다.

 또한 단군의 개국사실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모두 빼버린 ‘동국통감’도 이 땅에 남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규원사화’만이 원형 그대로 필사되어 기적적으로 남아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현존하고 있다.

 이런 우리역사말살의 죄과를 인멸하기 위해 광복직후 총독부는 모든 자료를 소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기록문서의 유리사진 원판 44,000여 장을 한국인이 밤중에 외부로 반출한 덕분에 일제의 조선침략 만행이 귀중한 자료로 오늘날까지 남게 된 것이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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