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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박사의 『유목민 이야기』 다섯.로마 제국의 기병대로 이용된 야지그족

로마 제국의 기병대로 이용된 야지그족

 

사르마티아족 가운데 가장 서쪽에 살았던 것이 야지그인들이다. 이들은 BCE 1세기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미트리다테스 왕 편에 써서 싸웠던 족속으로 로마 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로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로마가 다뉴브 강을 국경으로 확정한 후였다. 야지그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1세기 초에 댜뉴브 강을 넘어 로마의 영토 내로 들어오려는 시도를 했는데 로마는 이들의 침입시도를 손쉽게 격퇴하였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야지그인들은 좀 더 조직된 세력으로 로마와 만났다.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가 다뉴브 강 너머 다키아 왕국으로 쳐들어갔을 때 야지그 기병대가 다키아 왕을 도와 로마와 싸운 기록이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킨 그의 승리를 자랑하는 원탑을 세웠는데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 서 있는 이 다키아 전승탑에 야지그 기병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다키아는 다뉴브 강 이북에 있는 땅으로 오늘날의 루마니아에 속한다) 야지그 기병대는 말과 병사가 모두 미늘갑옷으로 전신을 덮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갑옷은 가죽을 옷에다 덧댄 것인데 미늘갑옷은 옷에다가 금속판을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하게 매단 것이다. 야지그 기병대의 미늘갑옷을 ‘카타프락트’라고 하는데 이는 ‘완전히 덮었다’는 뜻의 그리스 말이다. 야지그인들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전승탑에 중무장한 기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트라야누스 원주에 나타난 야지그기병대의 모습

야지그인들은 다키아 전쟁으로부터 60여년 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180) 때에도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당시 마르콤마니족, 콰디족 등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영토를 침략했는데 그들과 함께 야지그인들도 로마 영토 내로 침략을 감행한 것이다. 침략자들은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쇄도하여 아드리아 해 북안에 위치한 아퀼레이아를 약탈하였다. 콰디족이 6만 명의 로마인을 포로로 잡아갔고 야지그인들은 그보다 더 많은 10 만명을 잡아갔다는 기록이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의 만족 침략이 어느 정도로 큰 피해를 낳았던지 짐작하게 해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황제 베루스가 출동하여 이들과 싸웠는데 먼저 콰디족과 강화하여 로마인 포로를 돌려보내게 하였다. 아마 로마측은 돈을 주고 콰디족을 매수하여 여타의 만족들과 싸우게 만들었던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나머지 두 적들을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마르콤마니족이 살던 보헤미아 지역을 마르콤마니아, 야지그족이 살던 다뉴브와 다키아 사이의 땅을 사르마티아 속주로 각각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그 직후에 시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만족들을 로마 제국의 신민으로 포섭함으로써 변경 지역의 평화를 확보하려는 그의 뜻은 일부나마 실현되었다.

마르콤마니족과 야지그인들과 협정을 맺어 이들을 로마의 동맹부족(‘페데라티foederati’)으로 삼고 그들의 군사력을 용병처럼 이용하는 것이었다. 유목민족인 야지그인들은 기병 8천명을 로마에 제공하였다. 그리고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만족들은 댜뉴브 국경선에서 10 마일을 무인지대로 삼고 거기서 철수해야 하였다. (이 무인지대 협정은 후일 아틸라 시대에도 등장하는데 이때는 훈족이 아니라 로마가 다뉴브 강 남쪽 일대로부터 ‘5일 여정’ 거리까지 무인지대로 만들기로 약정하였다. 5일여정은 하루 여정을 20 킬로미터로 잡으면 무려 1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이다. 이러한 넓은 완충지대를 로마 영토 내에 설치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훈족이 로마제국에 비해 압도적 힘의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또 마르콤마니와 콰디족의 땅에 로마군 수비병을 2만 명 주둔시키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거둔 만족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사후 승전기념탑이 세워졌다. 예전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탑과 같은 모양으로서 전쟁의 장면들을 조각한 부조를 나선형으로 원주에 새긴 것이다. 마르쿠스 황제의 원주는 포로 로마노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콜로나 광장에 서 있다. 콜로나 광장(Piazza Colonna)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주(라틴어로 ‘콜룸나columna’)에서 온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존 베리(J. B. Bury)는 이 마르콤마니 전쟁에서부터 로마가 둔전병 제도(military colonatus)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족들에게 제국 내의 정착지를 제공하고 대신에 그들을 병사로 이용하는 제도로 동양에서는 둔전제屯田制라고 한다. 둔전병으로 된 만족병사는 자유로운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받은 땅을 이탈할 수 없다. 토지에 긴박되어 있는 만족 병사들의 이러한 처지는 중세 농노제의 원형이 되었다.

로마 영토 내로 수용된 8천 명의 야지그족 기병 가운데 5,500 명이 제국의 최북방인 브리튼 섬으로 보내져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일부 야지그 병사들은 그 가족과 함께 랭카셔 지방에 있는 브레메테나쿰 요새에 정착하였다.

▲트라야누스 원주에 나타난 야지그인들의 용

하나 흥미로운 점은 야지그족 병사들이 용모양의 군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람에 날리면 용처럼 길게 펼쳐지는 용기龍旗는 앞에서 말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전승기념 원주에서도 나타나고 영국에서 발견된 야지그족 묘지석에서도 그 모습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용은 중국에서 기원하였다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유럽의 야지그족은 용이 전쟁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깃발을 들고 싸움에 임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아주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이 이처럼 돌에 새겨지게 되었다.

용에 대한 관념은 야지그인들이 동북아와의 접촉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본 그리핀처럼 용의 관념도 유목민들에 의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된 것으로서 문화전파에서 아시아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지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 할 것이다.


참고서적
J. Bury, A History of the Roman Empire From its Foundation to the Death of Marcus Aurelius (1893)

김현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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