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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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수직주의적 예문화 전통 - 빼고 더하고 강조하고 비트는 힘
수직적으로 분리된 신분사회에서 예는 만남의 주체와 객체의 신분 혹은 사회적 ‘자리’ 또는 ‘크기’에 따라 만남의 내용과 방식을 달리한다. 신분사회의 예는 기본적으로 수직주의의 산물이다. 수직주의는 ‘위와 아래가 각자 제자리로!’로 대표될 수 있다.
맹자에게서 ‘정신을 쓰는 사람들’(勞心者)과 ‘육체를 쓰는 사람들’(勞力者)의 나뉨과 이들이 각각 다스리거나 다스려지는 것, 그리고 ‘남들의 밥을 먹거나’ ‘남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성이 모자라고 출산이 목적인 여자들과 생산하는 노예들이 각각 자신의 자리에 머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그들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의 ‘큰 정신들’은 정신을 쓰는 ‘정신 있는’ 사람들과 육체를 쓰는 ‘정신없는’ 혹은 ‘정신 적은’ 사람들로 구분하며, ‘각각 해야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나눈다.
자리가 위아래로 고정되니, 생각과 언행도 그에 상응하여 고정되기 쉽다. 나아가 삶의 방식도 자리에 따라 고정된다.
수직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한 쪽만이 위이고 중심이고 의미이다. 수직주의도 일종의 ‘함께주의’이지만, 이런 함께는 닫히고 막힌 ‘함께 속의 따로’다.
수직적 만남의 예문화에서 형식과 절차가 중시되면서 번잡과 거짓, 허식이 깃들 여지가 더욱 커진다. 또, 아래는 주변(周邊)으로 밀리며, 수동(受動)과 부동(不動)으로 변한다.
예문화 전통에서는 말을 앞세우기를 꺼린다. 말을 적게 하라는 전통도 수직주의 속에서 우리들의 소통크기를 작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논어의 ‘군자는 말에서 어눌하고 행동에서 민첩하고자 한다.’, ‘밥 먹을 때 말하지 않고 잘 때 말하지 않는다.’,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등은 말을 적게 하고 행동에 민첩한 것이 덕이고 예라는 것이다.
눌언(訥言), 어눌(語訥)의 ‘눌(訥)’ 자는 ‘말’(言)을 ‘들이거나’(內) 잘 내보내지 않는 모습을 가리킨다. 또, 도덕경의 ‘아는 자는 말을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 한다.’, ‘많은 말은 자주 궁하다.’,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등도 ‘말 없음’을 긍정적으로 본다.
‘조금 말하고 많이 행동하라’는 ‘눌언’(訥言)과 ‘민행’(敏行) 혹은 ‘말 안하기’를 말하는 ‘불언’(不言)의 가치와, 윗자리가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전달하는 예문화, 소통문화 속에 비논리와 왜곡, 군림과 부당, 눌림과 소외는 쉽게 일어난다.
‘재하자유구무언’도 불언과 수직의 문화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일상에서 명료하게 표현하기보다 은근히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도 말 적게 하기, 남 배려, 나 배려, 수직주의 등이 섞여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앞서, ‘말 잘 하는’ 정치인들이 ‘말 잘 먹는’ 식언(食言)의 문제 혹은 엉뚱한 이름 내밀기나 중의법적 말하기의 문제를 말했다. ‘말을 하라는 말인가, 하지 말라는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답은 혹은 문제는, 무엇보다 말하는 주체와 주제, 방식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수평적 함께’ 혹은 ‘다-입’ 크기의 키움에 말하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고전의 내용도 우리의 소통문화 크기와 직접 이어지겠지만, 이런 내용이 ‘실전’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왔는지 혹은 사용되어왔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석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든, 이들 고전(古典)의 말은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믿어지고 행해져왔다.
‘열’(十)의 ‘세대’(口)에 의해 전달되어온 시간적인 거리가 ‘옛날’(古)이고, ‘두 손’(廾)으로 받들 만한 ‘책’(冊)이 ‘전’(典)이다. 오랜 기간 두 손으로 받드는 곳에 예와 도덕, 나아가 권력도 함께 한다.
고전을 대할 때, 선현들의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긍정적인 씨앗이 살려진다기보다, 이미 인정받아 인증이 불필요한 선현들의 말이 역사적으로 외적 크기의 힘들에 의해 외적 크기의 힘들을 위해 제 멋대로 비틀리고 왜곡되어 온 측면도 많다. 이들은 ‘더’ 말할 수도 있으며 결정권도 크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하여 백성들에게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들은 착하지 않은 행동을 하며, ‘착함’이나 ‘옳음’ 등의 말로 자신들의 이익이 백성들의 이익으로 말해진다. 말에 의문을 품거나 말을 안 들으면 종종 ‘잘’ 준비해 놓은 법과 경찰을 들이댈 수 있다.
이런 생각이나 말로 - 그 힘이 크든 작든 - 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결정과 행동을 정당화하고 ‘예쁘게’ 하는 데에 골몰(汨沒)한다. 그들은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하며, 비틀 것은 비틀고 강조할 것은 강조한다. 이런 가감법, 왜곡법, 강조법을 따로 배우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감각적으로 잘 안다.
그들은 이런 외적인 힘의 크기를 유지하고 부풀리는 데에 능란(能爛)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자리 높이와 이를 유지해온 경험이나 욕심에서 그런 능란함의 근거가 찾아질 것이다.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기보다 이들을 자신들로부터 나누고 따돌리면서 자신들을 구별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홀로 할 때, 구별할 때 혹은 수직화할 때, 자신들의 외적 크기가 유지되거나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따라다니는 따돌림’에서처럼 ‘밀어 냄’과 ‘눌러 내림’ 속에서지만, 함께는 함께이다. 강약 사이든, 좌우 사이든, 상하 사이든 이들은 서로 나뉠 수 없는 운명이다. 아니, 이들은 나뉘기는커녕 서로를 전제한다. 함께를 전제하는 나눔이랄까? 혹은 나눔을 전제하는 함께랄까?
나뉠 수 있다. 나뉘어야 한다. 어떤 방식의 나뉨이냐가 문제다. ‘너무 나뉨’ 혹은 ‘잘못 나뉨’이 문제다. 이런 능란한 삶이 남들을 못살게 혹은 함께의 크기를 작게 하는 데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미미하다.
인증이 불필요할 만큼 통용되는 일상의 상식이나 가치, 신념도 이렇게 맥락을 바꾸고 강조하고 비틀면서 말해지고 들어지고 행해지기 쉽다. 또,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의 구체적 방식이나 내용은 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결정하고 많이 말한다.
존대와 하대나 호칭의 사회언어학적 문법이 하나의 방식으로 수직주의적 만남문화에 힘을 더해준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한 번 ‘형’이라 부르기 시작하면, 위아래가 자연히 형성되고, 언행도 ‘그에 상응하여’ 자연히 수직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때, 부정되어야 할 부당과 부담이 자연스레 따라올 수 있다. 이럴 때, 진정 함께이기가 어렵고 진정 나이기가 어렵다. 아래로서 먼저 그렇고,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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