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 |
|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수직주의적 예문화 전통 - 다른 옷의 같은 수직분리
‘그건 봉건주의 시대의 일이고~.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맞지만 틀리다. 맞고 틀림이 섞여 있다는 말이다.
현대에는 ‘현대적인 위아래’가 있다. 물론, 오늘날 위아래는 신분제의 봉건 시대보다 덜 고정된다. 그리고 위아래의 성격도 변했다. 현대에는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임시 윗사람들’이나 ‘임시 아랫사람들’이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퇴사하면, 이들은 더 이상 ‘윗사람들’이나 ‘아랫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나뉨, 특히 위아래의 나뉨 정도는 훨씬 심해지는 경향도 있다. 이는 무엇보다 ‘경제크기’에 근거한 나뉨이다. 나이나 남녀 등의 위아래 질서도 경제크기에 쉽게 좌우되며 역전될 수 있다.
도덕적, 정치적으로는 수평을,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일정한 방식의 수직을 인정하는 속에, 위아래 간 함께의 질서는 더 분화한다. 마치 정치적 수평주의의 옷을 입고 있는 경제적 수직주의 같다. 정치 수평도 결국은 경제 수직에 슬그머니 잠식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정치적 수평주의는 경제적 수직주의를 도와주는 수단일 수도 있다. 많이 물을 문제다.
나와 남, 위와 아래 사이의 이런 분화(分化)가 ‘너무’ 혹은 ‘잘못’ 일어날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개인적 분화(噴火)가 일어날 수도 있다. 참았던 화(火)가 뿜어져 나옴이 분화다. 이 시대의 최대화두 ‘양극화’는 그런 ‘너무’ 혹은 ‘잘못’ 나뉨의 대표적인 예다. 너무 나뉨, 잘못 나뉨은 갑질 소통의 중요한 토대라 할 것이다.
다양한 방식의 위아래 간 누름과 눌림의 만남질서라 할 수 있는 ‘작은 예문화’ 질서는 자신과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 물질 등을 충분히 보내고 받지 못하는 작은 소통크기의 한 중요한 근거다.
이런 수직주의적 소통의 방식은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든 느낌이나, ‘하나의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하면서 만남과 소통의 모체(matrix)로서 작용하고 있다. 위아래를 ‘잘 감안’할 줄을 아는 전통 예모의 수직주의는 경우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며, 내적 크기의 문제는 외적 크기의 문제로 이동이 일어나는 경향도 있다.
일정한 방식으로 역시 수직적으로 분리된 현대 사회에서, 수직적으로 분리된 자리들을 ‘잘 감안’할 줄을 아는 이런 만남의 법인 예는 사라졌다기보다 모양을 달리하게 된다. 수직 분리의 방식이 변한 만큼, 같은 만남 법은 다른 강조 질서와 다른 의미 질서 속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옷을 바꿔 입고 변신하면서 나타난다. 때에 따라 옷을 갈아입히는 ‘바비인형’처럼... 혹은 같은 제사지만 집집마다 ‘가가례’(家家禮)하며 다르게 지내듯이...
이런 모체는 근저에 깔려있어 잘 안 보이고 잘 못 느낀다. 보여도 자연스러워 보이고, 느껴도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길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혹은 현란한 ‘겉’의 논리 속에서 그 ‘속’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같은 수직분리’이므로, 이 시대의 만남질서 역시 어떤 면에서는 많이 ‘유교-적’이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이나 선후배 등을 따지면서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과 행동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대학의 학년에서도, 개그맨의 기수에서도, 경로당에서도 그런다. 이런 수직주의의 모체에 대한 정치경제적 전 작용맥락이 물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예문화전통 가운데서 상대를 배려하고 나와 남 사이의 나뉨 크기를 줄이며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수평적인 방향은 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는 예모지만, 그 속에는 수직이나 무지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여림이 같이 들어 있으므로, 살릴 때는 늘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 시대는 남과 다름을 배려하는 예모가 크게 부족하다고 했다. 남과 다름을 혹은 약함을 밀어 내고 눌러 내리고 무시하고 배제하는 무례와 폭력이 난무(亂舞)한다.
이렇게 수동적이면서 형식적이고 폭력적인 만남문화 속에서 수평적이고 진실한 만남의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평소통 속에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만남들이 난무해야 무난하고 평화로운 삶이 가능할 텐데...
배려가 꼭 상대를 도와주어야하는 부담인 것까지는 아닐 수 있다. 상대가 같은 사람으로 자유롭게 존재하기를 방해하지 않음 자체만도 이미 충분한 배려일 것이다. 남들도 다-사람으로 대하여 남들도 사람이려는 데에 해를 입히지 않음도 이미 충분한 배려일 수 있다. 남들의 삶에, 사람임에 도움은 못 주어도 피해는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의 있음을 없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를 못살게 하지 않음만으로 이미 배려다. 달라도 그냥 그렇게 ‘놔-두면’ 이미 배려다. 배제(排除)나 배척(排斥)은 좋은 함께의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 아니다. 상대의 삶을, 사람이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