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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민필호 선생(1898.2.27~1963.4.14) 서거일

임시정부를 지키고 크고작은 난관들을 해결하다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倂呑)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달아야 하고 주의사상(主義思想)이나 집권야욕(執權野慾)만 운운(云云)하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앞세워 나라와 민족이 사는 것이다"


민필호 선생은 우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독립운동가 중 한명입니다. 대대로 선비 가문에서 부유하게 공부하고 자랄 수 있었던 가문이었으며 큰 풍파없이 잘 지켜온 전통을 가진 집안이었습니다. 선생은 11세에 서울에 올라와 큰 형이 경영하는 경신소학교에 입학하였고 반년 후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며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학습을 했는데 이때 경술국치가 일어납니다. 졸업을 몇 달 앞둔 선생은 "일본의 연호가 적힌 졸업장을 받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말하며 중국 상해로 떠나버립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상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잇던 신규식 선생이 창설한 박달학원에 들어가 중국어, 영어, 역사를 공부하였는데 이 학원의 교수진은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선생 이었습니다.  한명 한명 너무 굵직굵직한 위인들이라 이런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 마치 현대 최고 지성인들에게 과외를 받는 기분이 들어 묘한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선생은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포한 14개조항의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신규식선생이 동지들에게 작성한 밀서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고, 신규식 선생의 비서가 되어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보좌하였고 일본인들의 비인간적인 만행과 동포들의 항일애국 정신과 업적을 우리나라, 만주, 미주 등에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선생의 업적은 이처럼 임시정부로 시작해서 임시정부로 끝이 나는데, 이곳에서 생긴 크고작은 업무를 도맡았고 어릴적부터 부관 및 수행비서로서의 경력을 통해 시야를 넓혔으며 임시정부의 중심이 되어 갔습니다. 당시 중국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양국을 상호 승인하였고 민필호 선생은 경기도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선생이 맡은 주된 일은 임시정부의 재정업무를 총괄하였는데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23년부터 1936년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선생의 비서로서 재정의 실질적 책임을 맡아 임시정부의 경상비 조달 등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던 선생은 임시정부가 집세를 6개월 이상 지불하지 못하자 이를 법정에 고소한 집주인 때문에 임시정부 대표로 법정에 출두하여 선생의 직장 보수 전부를 담보로 걸고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재정형편 및 경제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이후부터 서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신변안전과 활동을 지원하였고 김구 선생을 보필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매월 6만원의 경비로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 등 300여명의 생활을 유지해야했기에 선생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여 임시정부를 변화시켰습니다. 당시 선생의 직책은 판공실장, 임시정부외무부차장, 의정원 의원을 겸임하며 경제, 외교 등의 중책을 동시에 도 맡았고 1945년 10월까지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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