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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 이유립은 친일파였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린 이유립 선생이 친일파였다는 주장이 심심치않게 돌았었다. 그들이 말하는 주장의 진실을 찾아보자.

위서론자들의 주장: 
1. 이유립은 1931년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를 투고하였는데 시의 내용이 일제 하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내용이다. 

1931년 <조선>에 실린 이유립 선생의 시를 보자 

할일은 山갓치 차혓는데 세월은 엇재서 그다지도 멀니 달아가는가 수물에 또 두 살이 속절업시 지나갔구나. 오날도 외로히 생각에 저즈니 지나간 일은 꿈결과 갓고 앞해 할 일은.... 해오즉 自問自答이 理가 엇지 극진함이오 다시금 앞길을 생각하면 생각이 곳처 새로워지누나. 

[사회寫懷] 全文

이 시의 어느 부분이 '일제 하의 태평성대를 노래'했다는 것일까? 아래는 1933년에 발표한 시다.

백학산(白鶴山), 높은 봉(峰) 새날이 또 뜨고 천석평(千石坪) 넓은 들 벼 모 잘크네. 
구곡천(九曲川) 내림물 ?암(?巖)을 싸돌고 구성재(求誠齋) 옛바람 생황(笙簧)이 동하네. 아마도 이 촌락(村落)이  우리의 가향(家鄕)일레라.

[삭주(朔州) 을산촌(乙山村)]

이유립 선생의 고향이자 스승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편찬한 곳이 평안북도 삭주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어째서 '일제 하의 태평성대를 노래한건지?묻는 질문에 한 위서론자는 이렇게 답한다. 

1926년에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와 비교해서 이유립의 시를 보면 천석평 넓은 들에 벼가 잘 자란다는 대목에서 일제의 평화로운 통치에 감사하는 마음이 팍팍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저 시를 실어주었던 거겠죠.

그럴듯 하다. 비슷한 톤의 은유적인 시를 비교해보자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머리조차 가뿐하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 대목에서 일제의 평화로운 통치에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지 않는가? 

독립운동가 부친을 따라서 14세의 어린 나이에 독립군 활동을 도운 이유립 선생의 삶을 티끌만큼이라도 진실되게 받아들인다면 저렇듯 조롱섞인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삭주군지에는 14세의 천마산대 통신원 이유립李裕岦의 이름을 이유립李裕岩으로 오기하고 '삭주군 출신, 나이가 어려 천마산대의 대만對滿통신원으로 활동했다'고 행적을 밝혔다. 
- 양종현 [백년의 여정]중에서


위서론자들의 주장: 
2. 이유립은 1933년 친일 단체인 조선유교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먼저, 이유립 선생이 조선유교회(실제로는 명교학원)에 입교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자. 

* 한암당 이유립선생 연보 「백년의 여정」 상생출판

- 삭주 보통학교 재학중에 <삼육회>를 조직하여 역사와 상식을 강의
- <신간회> 삭주지부 발기에 참여했다가 강제 해산됨 
- <삼육사>를 조직하였으나 '광개토성릉비문실고' 기사로 인해 강제 해산됨 
- 일제에 구금 

어린시절부터 품었던 민족운동의 뜻이 일제에 의해 번번히 좌절된 때였다. 마침 '녹동서원(鹿洞書院)'의 개원 소식이 들려오자, 유림 사회에 널리 알려진 아버지 단해 이관집의 허락을 얻어서 남행을 결심하게 된다. 

“너의 뜻(민족운동)이 옳다면 이는 힘써 해 나갈 일이리라. 그러나 향촌鄕村과 사람들의 의식에 깃든 유교를 업고 나가면 세歲를 얻기가 수월할 것이요 새로이 민족정신을 주창하여 나가는 일은 실로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되리라.”

안순환이 세운 녹동서원의 명교학원은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단군교를 표방했으나 수업내용은 모두 유학적 내용이었다. 

정식명칭은 '조선유교회강학소'로 1기생 20명과 함께 입교한 이유립은 6개월간 '경학, 유교철학, 문학사, 종교학, 윤리 및 심리학' 등을 배우게 된다. 

조선유교회 명교학원 1기 졸업생 사진

6개월 수료후 조선유학회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을 맡아 1936년까지 서원을 드나드는 수 많은 교수생도와 친교를 맺고 서원의 장서각과 서원 인사들의 서적을 빌려볼 수 있었다.  

선생의 일생에서 도약기를 꼽는다면 아마 서기 1930년 초반의 청년기에 입경(入京)하여 입회한 안순환이 세운 명교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가전(家傳)한 많은 서책의 섭렵과 운초, 벽산, 단재의 사관을 기초로 비로소 경향 각지의 학자들을 만나 폭넓게 교류하며 민족주의 사관 정립과 바른 국사 찾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석주의 대동광의, 해학의 유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학구하는 한편 조선유학회 기관지 일월시보 주필로 활동하며 대종교와 단군교의 조직과 활동을 주시하고  장차 단학회의 재건을 모색하였다.

- 양종현, <백년의 여정>

위서론자는 이유립 선생을 친일로 몰아세우기 위해서 '친일 성향의 조선유교회에 입교하여..'라며 조선유교회의 친일성향을 부각하지만, 이유립 선생의 입교 동기와 행적은 전혀 다르다. 또한, 조선유교회가 친일성향이라해도 이유립 선생이 그곳에서 어떤 친일행위를 했다는 말인가? 

 

위서론자들의 주장: 
3. 이유립은 '조선유학회'에서 발행한 친일 성향의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일월시보 제 2호

 

이유립 선생이 주필로 있던 때는 일제의 폭압통치가 한창 물오르던 1930년대 말이다. 더군다나 조선국사 말살사업인 <조선사 편수>가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친일 세력들이 굳게 포진(布陣)했으며 친일기관지라고 알려졌던 <일월시보>에 '동방문화의 발상지' '환족'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나라건국' '대 황제'라는 표현까지 당당하고 거침없이 했다.  *일월시보는 1935년 2월 8일 창간하고 그해 10월 6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하였다. 
 

위서론자들의 주장: 
4. 이유립은 중일 전쟁 이후에 친일신문이 된 동아일보의 지국장을 역임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유교회>에 자리하던 단군교에 대한 일제의 노골적인 간섭이 심해지면서 폐쇄 위기에 몰리자 낙망하여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마침 <동아일보>의 필화 사건으로 인한 정간조치가 풀려 민족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백관수>가 1937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1938년 1월 21일 부로 <삭주지국>이 개설되어 임명된다. 

 

'[독립운동가 백관수 선생 조명 심포지엄 2월 2일 열려]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제7대 사장을 지낸 근촌(芹村) 백관수 선생(1889∼?·사진)의 사상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린다.' - 2015. 1. 29. 동아일보 기사중에서 
 

그리고 불과 4개월여 만에 그것도 5월 1일 <동아일보 삭주지국장> 자리를 떠난다. 동아일보에서도 차츰 친일적 색채가 농후해지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는 듯한' 논조들에 실망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겨우 4개월 남짓 재직하다가 돌연 5월 1일에 사표를 던진 시점이 위에 제시한 <동아일보>의 망언들이 집중적으로 실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그만둔 절차도 본인의 의사에 의한 퇴직인 [의원해직依願解職]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1938년에 들면서 일제의 징병·징용·공출 등의 인적·물적 수탈이 본격화하고 일제의 `언론보국'도 더 한층 선명해진다. 4월에 침략전쟁을 위한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조선의 혼을 빼앗는 `교육령'을 개정·공포한다. 

이 제도에 반대해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투쟁을 벌이다가 40여명이 투옥됐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 제도의 실시를 축하'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것이 팩트다. 그렇기에 이유립선생은 5월 1일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을 그만두는 사표를 썼던 것이다.

박덕규  dgdrag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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