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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박사의 『유목민 이야기』 - 훈족의 아시아 대원정

훈족의 일단이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판노니아로 진출한 이후 십여년 간 훈족의 큰 위협은 없었다. 그러다가 395년 훈족이 대거 아시아 지역을 침탈하였다. 훈족이 다뉴브 강 너머에서 출발했는지 아니면 돈 강 근처 흑해 북안에서 출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카프카즈 산맥을 넘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캅파도키아, 남쪽으로는 시리아까지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아시아 원정대는 두 개의 부대로 나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소아시아로 다른 한쪽은 시리아로 갔던 것이다. 시리아로 갔던 부대가 먼저 페르시아를 공격했던 것인지 아니면 시리아로 간 부대와는 독립적인 부대가 동쪽으로 티그리스 강을 건너 페르시아 영토를 침략하였던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이 갑자기 험난한 카프카즈 산맥을 넘어 먼 아시아 땅을 공격한 이유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훈족이 살던 초원지대에 기근이 들어 훈족이 아시아를 공격했다고 보지만 멘헨-헬펜 교수는 그보다는 이 원정이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대규모 노예사냥’ (gigantic slave hunter)로 본다. (52쪽) 5세기 시리아 출신의 역사가 테오도레트는 훈족이 시리아 청년들을 많이 끌고 가 하인처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멘헨-헬펜의 지적처럼 당시 일부 사람들은 훈족에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훈족에 가담하여 훈족과 함께 싸웠다고 한다. 아마 로마 사회에서 핍박받고 살던 하층민들의 일부가 훈족에 가담하였을 것이다.

훈족이 아시아를 짓밟고 있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347-420)가 살고 있었다. 영어로는 제롬(Jerome)이라고 부르는 히에로니무스는 학자들의 성인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바이블을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바이블에 대한 주석서 및 신학서들을 저술하였던 기독교계의 대학자였다. 그는 또 많은 편지들을 남겨놓았는데 그 가운데 친구인 헬리오도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아시아를 침략한 훈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보라. 아라비아가 아니라 북방의 늑대들이 작년 먼 카프카즈 산맥의 요새로부터 나와 우리를 덮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지방들을 짓밟았다. 얼마나 많은 수도원들이 그들에게 약탈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냇물이 피로 물들었는가! 안티오크 뿐 아니라 할리스 강과 키드누스 강, 오론테스 강, 유프라테스 강변의 다른 도시들도 그들의 공격을 받았다. 포로무리들이 그들에게 끌려갔다. 아라비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가 그들에 대한 공포로 사로잡혔다.” (편지 60)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쓴 편지에서는 기마유목민으로서 훈족이 얼마나 빠른 무리인 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 급보를 전하는 우편원들이 이리저리 달렸다. 동방 전역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훈족의 무리가 차가운 타나이스 강과 거친 마사게타이족 지역 사이에 있는 저 먼 마에오티스 호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곳의 사나운 족속들은 알렉산더의 문들로 인해 카프카즈 산맥 너머로 들어오지 못했다. 훈족이 그들의 빠른 말을 타고 이곳에 번쩍 저곳에 번쩍 나타나 살육과 공포가 온 땅을 뒤덮게 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는 내전으로 인해 멀리 이탈리아에 묶여 있었다.... 훈족은 어디서나 예상보다 빨리 들이닥쳤다. 소문보다 그들의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편지 77)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훈족이 아시아를 침공하기 몇 달 전인 1월에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 찬탈자 유게니우스와 싸우느라 로마군의 대부분을 이탈리아로 끌고 갔던 것이다. 아시아에 로마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훈족은 거의 저지를 받지 않고 진격하였다. 얼마 후 환관 유트로피우스가 약간의 고트족 부대를 동원하여 훈족을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398년 말에 동방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유트로피우스가 다음 해에 콘술 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승리 때문이라 한다. 그와 같은 환관이 콘술이 된 것은 로마 역사 초유의 사건이었다.

훈족의 아시아 원정은 후대인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로마인들은 당시 훈족을 이끌던 훈족의 두 우두머리 이름을 기록에 남겨놓았는데 바지크(Basich)와 쿠르시크(Kursich)라는 이름의 왕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스키타이 왕족의 남자’(άνδρας των βασιλεων Σκυθων)라고 이들을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스키타이는 우리가 앞에서 본 스키타이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스키티아를 차지한 훈족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후일 로마에 와서 로마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였다는 사실이다. 프리스쿠스의 책에 나오는 기록인데(279쪽) 안타깝게도 다른 로마 측 사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프리스쿠스가 449년 아틸라 왕의 본영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그곳에 사절로 왔던 서로마사절로부터 들은 것이라 잘못된 정보는 아닐 것이다. 멘헨-헬펜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차남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있던 404년 혹은 407년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55쪽) 그 후 훈족과 로마 특히 서로마는 급속히 우호적인 관계로 들어간다.
 

참고문헌
 
Otto J. Maenchen-Helfen, The World of the Huns : Studies in Their History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3)

R. C. Blockley, The Fragmentary Classicising Historians of the Later Roman Empire, Eunapius, Olympiodorus, Priscus and Malchus. Text, Translation and Historiographical Notes, Francis Cairns, 1983.

Letters of St. Jerome (www.newadvent.org)

김현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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