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이 자연스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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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반도, 섬보다 더 섬 - 우물 밖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음에 붙들려, 다름을 추구하기는커녕 인정도 못하면서, 같음으로서 다름을, 다수로서 소수를 그리고 위로서 아래를 밀어내고 억누르는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이해(理解) 때문이든 이해(利害) 때문이든,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것, 같은 것 혹은 가까운 것에 붙들린다. 그리하여 쉽게 ‘작은 목적’에 갇히며, 쉽게 보이는 것만 보고 아는 것만 인정하게 된다.
같음에 오래 빠져있을수록, 견문이 적을수록, 추상적일수록, 성찰이 없을수록, 나이나 성(性), 지위나 계층, 학벌이나 세계관, 가치나 취미, 말이나 문화, 관습이나 피부색 등에서 익숙한 것들에 붙들리기 쉬울 것이다. 이런 갇힘, 붙들림은 우리의 작은 소통크기를 계속 작게 한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란 표현을 쓴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볼 수 있는 공간은 강하게 제한되어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생각난다. 플라톤에게 늘 변화하는 믿지 못할 현실이나 인식 속의 사람들은 동굴에 갇혀 현실세계의 그림자만이 비추어지는 동굴 벽만 바라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같다.
플라톤이 플라톤답게 늘 변화하는 감각세계를 부정하고 절대적인 불변의 순수 정신세계를 상정하고 지향하기 위해 비유해본 유명한 우화이다. 불변하고 순수한 절대와 정신을 ‘참’으로 찾는 이런 지양과 지향 속에서는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될 여지도 함께 들어 있다 할 것이다.
보고 해보고 배운 것에 붙들린 우리들도, 스스로 상상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기는 우물 안 개구리와 마찬가지다. 우물 안 개구리의 경우는 우리의 상황이 약간 강조되어 또렷해지는 경우일 뿐이다. 또,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우물에서 보는 하늘보다 상대적으로 약간 넓다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물 안에 갇혀 있는 눈이 볼 수 있는 시야는 사방과 상하 육합(六合)에서 상(上)으로만이 터 있다. 개구리의 두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지름 1~2m의 원에 들어오는 하늘에 불과하다. 물론, 이 좁은 하늘을 지나는 잠자리나 새, 구름이나 낙엽 혹은 비행기나 달 등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두 귀로는 1~2m 밖에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하며 내는 소리도 들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 이 문제는 차치하기로 하자. 그때, 나머지 세상의 수많은 사물이나 현상들 혹은 세상의 거의 대부분이 개구리의 두 눈을 비켜간다. 이들의 모습은커녕, 이들의 존재유무도 모른다. 아니, 존재의 유무는커녕, 이들을 상상하는 것도 도무지 불가능하다. 개구리만의 잘못은 아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해서인가?
현대 사회에서 이런 우물의 모습과 기능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작은 우물’의 얽히고설킨 원인이나 결과들을 드러내는 일도 그리 녹록치 않다. 어찌 보면, 모두가 우물에 갇혀 있는 운명이므로, 정도차이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앞이나 뒤가 막혀 있거나 옆이 막혀 있어, 일상에서 물질적으로도 일망무제의 시야를 얻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려하니, 무엇보다, 쫓고 쫓기는 시대이기에 시간이 모자라다. 하나에 빠져 하나를 ‘다 볼’ 때까지 골몰(汨沒)할 시간이 거의 없다. 주변의 사람들이나 제도, 환경이 자꾸 끼어들면서 우리를 자꾸 붙들거나 가두고 몰아댄다.
절대적인 일망무제에 오를 수 없는 한, 또 가시거리가 유한한 한, 우물의 지름이 1m든 1,000km든, 모두가 우물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간존재의 이러한 상대성과 유한성에 대한 불만과 불안의 맥락에서, 플라톤이나 많은 종교에서처럼, ‘절대’가 만들어지고 ‘무한’이 상정(想定)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배제되는 다름을 묻고 드러내고 넘어서기 위하여, 무한하고 절대적인 우물크기나 인식의 크기를 꼭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꼭 종교나 형이상학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방식으로 ‘작은 우물’에 갇히게 될 때, 그 갇힌 세계의 밖 내지 그 세계와 다른 세계는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든 우리가 붙들려 있음과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나 자신과 남들의 붙들림을 넘어, 이를 상대화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같은 붙들림이지만 그 정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도 될 것이다.
이를 알 때, 우리는 좁은 우물을 상대화하고 떠나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니, 이미 조금은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다름들을 만날 수 있을 때, 견문도 넓히고 창의적인 사고나 비판력도 상상력도 키우며, 함께의 조화를 찾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기를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교육과 문화도 ‘발전한’ 현대에 나라밖의 다른 존재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만날 기회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가수 싸이(Psy)의 노래와 춤이 금방 전 세계로 퍼진 것 하나만 보아도 이를 바로 알 수 있다.
동남아 등 우리 주변국들의 여인들이 농촌의 총각(總角)들과 결혼하여 이 땅에 정착하는 현상은 굉장한 변화라 할 것이다. 일자리가 남아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실업률이 날로 문제되는 시대에, 주변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온 것도 갑작스런 변화다. 무거운 돌 하나 옮기기로 선발하여 서독에 광부로 보내던 때가 그리 머지않은 때였었는데...
다름들이 있어야 다름과의 만남 문제가 발생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다름들 만남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과거에는, 다름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발생했다. 다름들을 합리적으로 대할 줄, 다룰 줄 모르다가 갑작스럽게 다름들과 만나다 보니, 수많은 다름/같음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외부의 다름들 만남이 적었던 과거에는 다른 다름의 문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유신 때, 정권과의 다름에 대한 사상적 통제와 정치적 탄압이 심했다. 심지어 시민들의 머리나 치마의 길이를 국가가 통제하고,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을 제한하고, 나아가, 영화나 노래의 내용을 자르고 변형시키면서, 선량한 국민들의 행동반경을 크게 제한했다.
국가의 통제가 옷 색깔이나 신발 모양까지는 미치지 못하여 그나마 다행이다. 아니다. 깜박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옷과 신발은 철저히 검열 당했다. 나 스스로 경험했으니까... 양말의 색깔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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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