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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훈 교수의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사상』 세번째 이야기

지난 2018년 6월 2일 동국대 신공학관 대강당에서 “민족통일 과제와 단군”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단군학회 2018 (단기4351) 봄철 학술회의”에서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론]을 발표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영훈 교수의 발표 논문을8회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단군민족주의자 조소앙 - 단군민족주의적 역사인식

소앙은 한국민족의 역사가 환인ㆍ환웅ㆍ단군에 의한 개천(開天)과 개국(開國)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그는 우리민족은 환국(桓國)과 단군조선 이래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5천년동안 자주독립을 유지해왔다고 말한다.  그에 있어 단군의 건국은 민족사의 자주적이고 성스러운 출발을 의미하는 민족사의 기점이었다.  「건국절단군소사연고」(1944)에서는 개천절의 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늘은 한국의 개천절 또는 건국절이니, 국조 단군이 지금부터 4391년 전(기원전 2457)에 탄생하여 4277년 전(기원전 2333)에 건국하신 데서 기인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 환인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환웅이 천부인 3개를 얻어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에 와서 왕을 칭했으니 이 이를 환웅천왕이라 부른다.  그는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하며 理化世界하였다. 환웅의 아들 환검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가 단군이다.  22년이 되었을 때 평양(平壤ㆍ遼陽ㆍ永平)으로 천도하고, 재위 93년에 구월산 당장경으로 옮겼다가 경자년에 아사달산에서 승하하셨다.  그의 태자 부루가 왕이 되니 이가 부루대왕이요 그 또한 단군이라 칭했다.  단군은 살아서는 성덕이 있어 四隣을 감화시켜 建國 開元하니, 垂統創業의 功과 開物成務의 德이 오늘에 이르도록 다하지 않았다.”

단군조선 역사에 대한 인용에서와 같은 소앙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대종교의 그것에 영향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에서 차별성이 존재한다.  가령 단군이 탄생한 시점(개천)을 건국시기보다 124년 이전의 일로 본 것이나, 단군이 건국한지 22년만에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93년 되는 해에 아사달에서 승하하였다고 서술한 것 등은 대종교측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종교가, 서기전 124년의 사건을 단군이 ‘이신화인’하여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시기로 보는데 대하여, 소앙은 그 시기를 단군이 환웅의 아들로 탄생한 시기로 본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후의 관련 연도를 적음에 있어서도, 대종교가 단군의 강림 시기부터 기산하는 ‘개천’ 연호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소앙은 단군의 건국을 기산하여 적고있다는 점도 다르다.  이는 소앙이 대종교의 역사인식을 건국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하여 합리적으로 조정하였음을 의미하며, 대종교와의 차별성을 의도적으로 꾀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논설에서는 인용문에 이어, 단군능과 마니산 참성단, 삼성사ㆍ숭령전ㆍ팽우비 등 단군과 관련된 유적 또는 기념물과, 󰡔고기󰡕ㆍ󰡔위서󰡕ㆍ󰡔신지비사󰡕ㆍ󰡔동국통감󰡕ㆍ󰡔규원사화󰡕 등 단군사적을 전하고 있는 옛 사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앙은 단군(조선)을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로 보았다.  그는 민족의 요소를 영토와 주권ㆍ언문(言文)ㆍ경제ㆍ문화 및 정기(正氣)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민족에 있어 이 같은 요소는 단군시대(檀朝)에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소앙은 본격적인 사학자는 아니었지만, 민족문화에 대하여 강한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독창성을 논증하기 위한 다수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소앙의 민족 상고사인식은 멀리는 󰡔규원사화󰡕 등에 보이는 선가적(仙家的) 민족사인식-민족의식의 계보속에 있고, 가까이는 단재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과 대종교의 역사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소앙은 고유의 유산과 역사를 중시하고 그를 발굴하여 드러내려 하였지만, 그러나 맹목적으로 미화하거나 추종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보편적 양식에 맞추어 조정하고 정비하려는 자세도 갖고있었다.  1942년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경일 건국기원절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념하자는 논의를 소앙이 주도했던 사례는 이점과 관련하여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건국기원절은 단군의 건국이 민족사의 출발점임을 확인시키고 그를 통하여 민족적 정체성확인과 통합을 기하기 위해 지정한 국경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해 독립선언일(3월1일)과 함께 대한민국의 2대 국경일의 하나로 지정되었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언제로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으며, 국경일 제정시에는 한말이래의 관례에 따라 음력 10월3일로 정하여 일단 출발했었다.  그러다가 1942년에 조소앙이 기념일을 양력 10월29일로 고정하자는 개정안을 제출함으로써 다시 논쟁이 시작되었다.  소앙은 당시 국제적으로 양력이 통용되는 추세에 맞추어 건국기원절도 양력으로 환산하여 날짜를 고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건국날짜가 양력10월29일로 환산되어 기념되고 있다는 점을 제안이유로 들었었다. 
  
소앙의 문제제기 이후 고조선이 건국한 날짜가 언제인지와 기념일 날짜는 며칠로 할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소앙은 단군의 건국일이 양력으로 10월29일인 근거를 제대로 대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논쟁은 소앙의 개정안과 양력 10월3일로 고정하자는 의견 및 종전처럼 그대로 두자는 의견들이 대립하다가, 김구 등의 중재에 따라 혁명이 완성된 뒤에 다시 논의하고 일단은 현행대로 시행하기로 하고 논의를 종결하였다.  소앙의 제안은 소앙의 양력환산 날짜의 근거가 불충분하였던 데다가 다른 주장들이 강경한 탓에 좌절되었지만, 전통과 전승을 보는 소앙의 입장이 확인되는 것 같다.  그는 건국기원절이라는 전통은 유지하되, 그를 국제적으로 일반화한 양력을 채용하여 정비하고자 하였다.  소앙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해선 안된다고 보았으며, 합리적 근거를 따져가면서 현대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앙은 민족적 정체성이나 자긍심 같은 요소도 중요하지만 그는 가급적 실증적 근거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건국의 일시에 대한 기록이 실증적 근거가 취약함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전승되어온 기록과 관습이 있고 민족적 정체성 확립이라는 실천적 차원의 과제도 중요하다고 본 것 같다.  이런 그의 생각은 [건국기원절기념회의 의의] 제하 논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논설에서 보면 소앙은 상고사 관련 인식들이 ‘역사과학’의 차원에서는 그 근거에서 취약한 측면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건국의 연도와 월ㆍ일까지 특정하는 것은 “역사과학의 안목으로 보면 可笑可憐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건국연대에 대한 기록이 민간에서 통용되어 왔고, “기념의 意義에 훼손됨이 없다”는 이유로 건국기원절을 기념하는 행사를 적극 긍정하였다.  ‘금일 우리의 혁명운동’은 ‘민족적 혁명운동’이며, 이 운동은 ‘조선최초 국가의 발생’으로부터 출발한 것인 만큼, 비록 건국시기를 특정하는 ‘공용기원’이 확실한 기록이 아닌 신화전설에서 유래하기는 하나, ‘조선의 유구한 역사’와 민족정체성을 상징하는 의의가 크고, 그 시비를 가릴 근거도 없는 만큼, 전래의 것을 인정하여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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