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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채기중 선생(1873.7.7~1921.7.9) 서거일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부호를 처단하며 일제에 맞섬

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죽겠노라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오만 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선생이 옥중에서 남긴 시-

 


독립운동가 채기중 선생은 어려서부터 일본군에의해 곤욕을 치루게 되었는데 선생이 살던 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이었기 떄문이죠. 어려서부터 남의 억울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할만큼 의협심이 강했다고 합니다. 근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높은 수준의 한문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무려 76개의 한시를 지을 만큼 한문의 경지가 높았습니다.

선생은 경상도 영주지역으로 이주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영주지역은 전국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행하던 애국지사들이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1913년 풍기광복단 ('풍기'는 '영주'의 옛 이름) 을 조직하였는데 이곳에 가입했던 인물 중 의열단의 전설, 조선의 쌍권총 김상옥 의사를 만나게 됩니다. 선생과 김상옥의사를 포함한 초기의 풍기광복단 멤버들은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극히 '평범한' 자들이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던 청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풍기광복단의 첫번째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고 이를 위해 선생을 포함 소수의 초기 멤버들은 일본인 부호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하게됩니다. 그 후 선생은 1915년 대한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였는데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이 연합 확장되어 만들어진 비밀단체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의 신흥무관학교를 포함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것이 주요 목표였는데 군자금을 모집하여 해외기지를 지원하는 국내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한광복회가 군자금만 모집한 것은 아닙니다. 대한광복회에 들어온 대부분의 사람은 의병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양성 도 진행하게 되죠.

이러한 대한광복회의 활동 중 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활동을 담당했던 인물이 바로 채기중 선생인것입니다. 실제로 선생은 대부호들에게 나라를 위해 의롭게 쓰이는 의연금을 지원하라는 문서를 배부하였는데 당시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부호들이 군자금을 내지 않아버렸습니다. 선생은 친일부호를 처단하며 경각심을 고취시켰는데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게 되었습니다.

선생이 직접 가담하여 처단한 친일부호는 장승원이며 당시 같이 친일파 처단에 가담한 인물들은 모두 풍기광복단 출신입니다. 장승원 처단사건은 친일부호 처단 활동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며 친일파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일본경찰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친일파 박용하를 처단하면서 조직이 발각되어 핵심 멤버들이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게 되며 조직이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 와중에 선생 또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순국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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