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열음, 인성 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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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배제의 ‘배’에서 배려의 ‘배’로
‘정말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나뉘고 나뉘다 더 이상은 나뉠 수 없는 존재가 개인이지만, 개인들은 자신들의 모임인 사회로부터도 나뉠 수 없다고 했다. 앞의 나뉠 수 없음은 끝까지 나뉘었기 때문이고, 뒤의 나뉠 수 없음은 개인의 삶이 만남과 소통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나뉠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반’(半) 자연이기에 ‘반’(反) 자연의 측면도 있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사회를 이루면서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IMF 규모의 막대한 녹색기후 기금이 글로벌 차원에서 형성된다.
오늘날의 우리가 함께 사는 모습과 방식에 문제가 없는가? 우리에게 ‘함께의 크기’는 어떠한 이상(異常)도 없어 그 이상(以上)일 수 없는 이상(理想)인가? 아니다. 일자리는 없고, 있어도 ‘질 나쁜 일자리’가 많고, 똑 같이 일해도 반만 받는 일자리가 반이다. 무엇보다, 부자는 갈수록 부하게 되고 빈자는 갈수록 빈해지다가, 급기야 또렷한 양극(兩極)화로 대립(對立)한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리하여 한 쪽의 삶이 어려우면 다른 쪽의 삶도 결국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신자유주의의 자연스런 약육강식 시스템 속에 자꾸 위와 아래로 그리고 나와 남으로 ‘너무 나뉘어’ 멀어지는 함께의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물질이 나뉠수록 정치적으로 이념이 나뉘며, 정치적으로 이념이 나뉘니 경제적으로 물질이 더 나뉘는 것 같다. 특히, 경제적 상하 양극화와 정치적 좌우 양극화는 서로를 부추기는 것 같다.
그리고 위정자들의 좌우 양극화는 국민들을 양분함은 물론, 위정자들과 국민들 사이도 자꾸 가르는 듯하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 싸움, 아니, 싸움 정치 속에 국민들의 혈세는 술술 새어나가며, 국민들이 실제로 먹고 사는 삶은 날로 어려워지니까... 적어도, 여전히 어려우니까...
그만큼 함께의 모습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삶인데, 함께할 수 없는 삶이런가? ‘함께 나눔’이라기보다 ‘나뉘는 함께’랄까? 하나의 자유가 다른 하나의 자유를 막으니, 하나의 모순임에 틀림없다. 나쁜 ‘따로 함께’다.
양극화, 수직주의, 주입식교육, 획일주의, 나 중심주의, 물질 중심주의, 얼렁뚱땅의 문화 등은 우리사회의 진단에서 늘 빠지지 않는 기본 문제다. 다시, 부정적인 따로 함께다. 이들로부터 또 다시 수많은 따로 함께의 문제들이 파생해 나간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학생들을, 놀리고 때리고 빼앗고 심부름 시키고 불안에 떨게 하고 급기야 죽게 하는 만남의 모습, 소통의 모습, 함께의 모습이 뉴스의 단골메뉴가 된 지 오래다. 이런 함께의 모습에서는 누구는 사람일 수 있고, 누구는 사람이기가 어렵다. 뒤의 ‘사람이기 어려움’ 속에서 앞의 ‘사람일 수 있음’도 오래 가기는 쉽지 않다. 아니, 앞의 사람이기도 ‘진정한’ 사람이기랄 수 없을 것이다.
학교 밖에서도 그런다. 학교 안이 먼저일까, 학교 밖이 먼저일까? 둘 다 먼저? 외적 크기 속에서 외적 크기로서 외적 크기를 위해, 나와 너가 상하로 나뉘어 누르고 눌리며, 자타로 나뉘어 밀어내고 밀어내지는 함께는 ‘괜찮은 함께’일 수 없다. 이런 누르고 눌리거나 밀어내고 밀어내지는 함께는 ‘밀어내는 함께’, ‘수직 함께’, 나쁜 ‘따로 함께’ 내지는 ‘겉도는 함께’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 생각하는 존재, 서로 그리워하며 그리는 존재가 ‘사는 존재’인 사람일 텐데... 학교 안팎에서 바로 이런, 아니, 이러야 할 사람들이 사람이 살 길을 막는다.
‘살다’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랑하다’도 나왔다고 여겨진다. 랑하다에는 ‘생각하다’와 ‘사랑하다’의 뜻이 모두 있다. 사랑하면 생각 속에 온통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과 그리움, 그림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리하여, 어원적으로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아래라고, 남이라고, 소수라고, 다르다고 따돌리고 못살게 한다.
좀 긴 시간에서 혹은 시각(視覺)에서 본다면, 배제당하는 자는 물론, 배제하는 사람도 살기가 어려워진다. 우선은, 당하는 자들이 스스로 자위(自衛)하려 하고, 세상이 법으로든 도덕으로든 의(義)와 선(善)으로써 이들을 지켜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일 수밖에 없는 삶에서, 남의 삶이 훼손되면 이와 함께 나의 존재기반도 훼손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분화될수록, 나의 삶은 남들의 삶에 더욱더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아가, 남들이 무시되고 배제되는 질서와 정서에서, 그들의 남인 나도 무시나 배제 됨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바름’(正)으로 돌아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위아래로 나뉜 함께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위가 아래에 더 종속된다. 아래가 있고나서, 아래의 위에 위가 있기 때문이다. 순자는 배 아래의 물은 배를 있게도 없게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분명, 아래에서 위가 파생되었지, 위에서 아래가 파생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이 아래에 있고나서 배가 위에 있을 수 있으니, 배는 물을 존중하고 함께하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서 위아래는 부자지간의 위아래가 아니라, 군신지간의 위아래, 사회적 지위에서의 위아래를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름 차원에서라면 혹 몰라도...
사람을 살려 주는 쪽이 인자(仁者)란다. 사람들은 불인자(不仁者)를 떠나 인자에게로 몰린다는 맹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도 말한다. 이는 내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남, 나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남을 불인(不仁)으로 밀어낼 때, 남과 함께 나도 설 자리 혹은 살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을 밀어 냄은 동시에 나를 밀어 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순자와 같은 생각이다. 여기서 나는 윗자리의 나다. 그러니까 남은 아랫자리다. 윗자리에 있으려면, 계속 위이려면 혹은 계속 위아래를 나누려면, 아래에 잘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위도 살고 아래도 살고, 위도 있고(존재하고) 아래도 있고(존재하고)...
이들에게 위아래가 모두 같은 사람,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위아래로 나뉘는, 나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일종의 ‘따로 함께’ 혹은 ‘다른 같음’의 논리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들에게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되, ‘정말 같은’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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