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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훈 교수의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사상』 네번째 이야기단군민족주의자 조소앙 - 소앙의 단군민족주의

지난 2018년 6월 2일 동국대 신공학관 대강당에서 “민족통일 과제와 단군”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단군학회 2018 (단기4351) 봄철 학술회의”에서 [조소앙의 단군민족주의와 삼균론]을 발표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영훈 교수의 발표 논문을8회에 걸쳐 연재코자 합니다.  /편집자 주/

 

 

4. 단군민족주의자 조소앙 - 소앙의 단군민족주의

 소앙은 중국으로의 망명(1913)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종교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종교 계통의 역사인식과 사상을 접하고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던 시기에 한때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은 이무렵 이미 상해에 정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대종교 지도자 신규식(1879-1922)의 주선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며, 상해에서는 신규식ㆍ박은식ㆍ홍명희 등 대종교인들과 함께 동제사를 개조하여 박달학원을 창립(1913)하기도 하였다.  그가 기초하여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도 참여자의 중심은 대종교인들이었다.  역시 그가 기초하여 1919년 초에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은 중광단이 중심되었다 하여 [중광단선언]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광단은 대종교 교도가 중심되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소앙이 대종교계 인사들과 밀접히 교유하였다는 것은 그가 ‘단군민족주의적’ 문제의식과 정서를 대종교인들과 공유했기 때문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앙이 가지고 있던 ‘단군민족주의적’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사례는, 세계의 인류를 정신적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그가 젊은 시절에 창안(1915)한 六聖敎 구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구상한 육성교에서는 단군과 석가모니ㆍ공자ㆍ소크라테스ㆍ예수ㆍ모하메드 등 주요 종교의 창교자와 지적 지도자들을 ‘一神’의 ‘神子六聖’으로 간주하여 함께 숭배한다.  그런데 숭배할 6인의 성인 중 가장 먼저 거론된 성인이 단군이다.  그의 6성교 구상이 정식 교단으로 발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국조’인 단군을 숭상할 성인 중 가장 앞세우고 있는 발상은 그가 갖고있는 단군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의 반영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종교는 스스로를 ‘百敎之祖’이자 ‘百敎之宗’으로 보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ㆍ불ㆍ도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대종교에서 갈려나갔다고 보는 것이다.  또 모든 인류가 하늘이 끼친 天民이고 특히 우리민족은 인류의 시원민족으로서 5색인종이 우리민족에서 갈려나갔다고 보기도 한다.  소앙이 이같은 대종교 특유의 생각을 공유하였던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지성의 선구자들을 모두 ‘일신의 신자육성’으로 생각하고 그 수석의 자리에 단군을 배치한 것은 분명히 단군민족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앙에게 있어 단군은 단순히 민족적 정체성을 고취하고 동포애나 헌신의지를 환기시키는 장치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단군시대의 고유적 유산 속에 현대적 과제를 헤쳐가는 데 도움되는 지혜와 지침이 있다고 보았다.  소앙이 단군과 개천절을 기리는 논설을 자주 발표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후 조소앙이 안재홍ㆍ신익희 등과 함께 [檀君聖蹟護維會]를 결성(1949)하여 마니산 참성단 등 단군관련 유적을 보호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같은 문제인식의 산물이었다 하겠다.  이 단체는 단군의 유적을 보호하는 사업은 민족정기를 똑바로 세워서 독립과 자유와 통일단합을 재촉하는 기본조건의 하나라 본다.  그리고 그 동포애와 민족의식은 단순히 독립자주의 정신을 추켜올리는 데서 더나아가, 尊民共和ㆍ대중공생을 추구하는 균등사회ㆍ공영국가를 철저히 만들어가기 위한 기본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단군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초계급적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은 납북되기 전까지 소앙이 갖고있던 관심사의 하나였다.
  
소앙이 중시하였던 단기 연호와 개천절 국경일, 홍익인간 사상은 1948년 새 정부가 출범한 후 제헌국회의 입법조치를 거쳐 국가의 제도의례 속에 자리잡았다.  물론 소앙은 단군민족주의가 법제화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국이 남북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것에 반대하여 5.10선거에 불참하였으며, 따라서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 멤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앙은 단군민족주의를 국가의 제도의례 속에 영입하게 만든 진원지의 하나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소앙은 단군민족주의 의식을 소극적으로 공유한 데 그치지 않고, 그를 다듬어서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현실에 적용한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특히 홍익인간 사상이 교육이념으로 채택된 일과 관련해서는 소앙의 역할을 특기해주어야 할 것이다.  소앙은 홍익인간을 발견하여 보급한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홍익인간을 단순히 주변에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를 민족공동체 건설의 사상적ㆍ이념적 기조원리로 삼았다.  삼균주의와 건국강령의 사상적 연원의 하나를 홍익인간사상에서 찾았던 것이다.  소앙은 홍익인간에 대한 후대의 이해방향과 관련해서도 크게 영향을 준 것 같다.  특히 홍익인간의 ‘홍’을 ‘균등’의 의미와 가까운 ‘널리’로 해석하게 한 진원지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로 흔히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弘’에 대한 자전적 해석은 ‘넓을 홍’ 보다는 ‘클 홍’이 우선이라 하겠다.  그리고, ‘홍’을 ‘클 홍’으로 해석하면 홍익인간은 “크게 인간을 이롭게(행복하게) 하라”로 해석하는 것이 순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크게’와 ‘널리’는 의미상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널리’라는 말은 ‘크다’는 말보다 평등-균등의 의미가 훨씬 더 강한 말인 것이다.  오늘날 ‘홍’을 ‘널리’로, ‘홍익인간’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라 번역하는 일반적 해석관행이 자리잡은 데는 소앙의 영향이 있다고 추정한다.  소앙이 홍익인간을 평등-균등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그를 삼균주의나 건국강령에 반영하면서, 그같은 해석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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