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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대전으로 본 동아시아 패권의 역사 [2부]

지정학적 요충지 한반도

 

■ 경기만의 주요 유적

가. 암사동 선사유적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경기만은 이처럼 생물자원이 풍요했기 때문에 선사시대 이후로 문화가 모

암사동 선사유적지

이고 발전하는 곳이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은 기원전 4000∼3000년 무렵에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터 유적이다. 1925년의 대홍수로 발견된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수렵·채집으로 생활하며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와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비롯해 돌도끼·돌화살촉·긁개 등의 생활도구와 돌낫·보습과 같은 농기구 등의 석기가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이 유적지에서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백제시대의 유적이 모두 발견되어 한강유역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주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고인돌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강화도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경기만에서 신석기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뿐만이 아니다. 강화도에는 확인된 것만 12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거석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지난 2000년 전북 고창, 전남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부근의 고인돌

강화도 고인돌은 대부분 섬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부에는 고인돌의 흔적이 나오지 않고 있어 한반도 서북부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최근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고인돌은 황해연안을 따라서 환상형(環狀形)으로 분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해양을 매개로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와 한반도는 전 세계 고인돌의 50%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의 왕국’이다. 고인돌을 만든 이들은 홍산인들이 동진(東進)하기 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다. 한민족의 성지, 참성단

이뿐만 아니라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에 위치한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천제

참성단

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다. 「고려사」에는 참성단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이다.(摩利山 在府南山頂 有塹星壇 世傳檀君祭天壇 [고려사 제56권 16장])”라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곳이 한민족 역사 초창기부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정족산성으로 불리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것으로 “삼신을 수호하는 핵랑”이라 하여 그들을 삼랑으로 부른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경기만을 쟁취하기 위한 각축전

경기만은 예로부터 동아지중해에서 모든 항로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비옥한 땅으로 인해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 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하계망과 내륙수로를 통해서 내륙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경기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다.

삼국 중 이곳을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위례성에 자리를 잡은 한강 백제는 경기만을 중심으로 중국에 이르기까지 해상백제를 건설한다. 인천의 문학산성, 서울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백제고분군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백제를 이어 경기만을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경기만을 장악하면서 명실 공히 동아지중해의 주인공이 된다. 이후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통해 한강 이남까지 장악한다.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와 아차산성 등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가 이곳에 영향을 끼쳤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을 점령한 것은 553년에 이르러서이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경기만으로 나가는 출해구(出海口)를 확보한다. 당항진은 대중국무역의 교두보였으며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는 신라문화가 이곳에까지 퍼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통일신라 이후 삼국의 문화는 하나로 통합된다. 이처럼 경기만과 한강유역은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 한민족의 문화가 창조되고 융합된 한민족 문화의 요람이자 중심지였다.

충주 미륵사지 마애불

 

■ 수운로(水運路)를 따라 형성된 안녕의 기도처, 마애불

고려와 조선에서 지방을 통치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은 일반 행정이 아니라 조세와 공납의 수납이었다. 그래서 연해(沿海)의 요지와 강구(江口), 또는 하천과 하천을 연결하는 지점에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일정한 수의 조선(漕船)을 상비하여 매년 일정기간에 양곡을 경창(京倉)으로 수송하였다. 그래서 수운로는 조세와 공납의 수송뿐만 아니라 물류와 인마의 이동로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과 관아가 들어섰다.

충주 미륵사지 마애불

그리고 이곳을 따라 왕래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과 마애불 등이 조성되었다. 충주 미륵사지는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는 월악산 하늘재를 넘던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던 곳이었으며, 중원 창동마애불(충주시), 중원 봉황마애불상군(충주시), 괴산 미륵리석불(충북)은 통행객의 시름을 달래주던 기도처였다.

 

■ 경기만과 한강 문화권의 생태와 문화 보존

우리나라 해양생물의 보고(寶庫)이자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인 경기만과 한강은 한민족 문화 형성의 용광로였다. 또한 경기만은 기수역을 형성하여 다양한 고유어종과 생물이 살고 있는 해양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나 지금 경기만은 파괴되고 있으며,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공존해왔던 생물들은 멸종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곳에 대한 정확한 해양생물 조사와 보존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휴전선으로 인해 하늘 길과 바닷길이 막혔으며, 도로가 막혔다. 이로 인해 민족의 마음에 서로 벽을 형성하며 문화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만나는 한반도 중에서도 그 중심에 있는 경기만과 한강은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고 융합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엔 아직도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 남아있어 잠들어 있는 문화재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경기만을 장악하기 위해 벌였던 역사적인 전쟁에 대해 알아본다.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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