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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대전으로 본 동아시아 패권의 역사 [3부]

인후지지咽喉之地 강화도를 사수하라

 

■ 동아지중해의 중심 한반도

서양 지중해의 고대국가 그리스가 대륙국가인 페르시아에 승리한 것은 페르시아와 마주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같은 대륙국가인 마케도니아가 펠로폰네소스

경기만

반도를 장악하자 해양국가인 고대 그리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반도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가는 길목이며, 반대로 해양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위해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에게 길을 내달라고 한 것이나 근세의 정한론(征韓論)도 그것이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일본을 막기 위해 조선에 온 것과 현재 중국이 북한을 보호하는 것도 또한 이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는 한반도의 인후지지(咽喉之地)인 경기만 중에서도 그 핵심에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혈구(穴口)라 불렸다. 이곳을 점령하는 국가가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었다. 현재 한반도를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동북공정, 식민사관)과 한반도 긴장상태는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정확한 안목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한 이유

가. 정묘호란의 발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에 걸친 전란을 치르고 난 조선에서는 선조가 죽고, 그 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이 당시 명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한 것을 기회로 여진을 통일하고 칸(汗)에 오른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만주 일원을 완전히 제압한다. 그리고 요양방면으로 진출하여 1625년에는 수도를 심양으로 옮기고 명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강화한다.


이미 힘의 균형이 명에서 후금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은 광해군과 북인(北人)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고, 서인이 중심이 된 인조 조정의 외교정책은 중립정책에서 급격히 친명반후금(親明反後金)을 견지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후금에서는 누르하치를 이어 그 아들 태종이 즉위하여 조선 원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명나라를 돕고 있던 배후의 조선을 치고, 명과 차단된 교역을 조선에서 수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627년 1월 13일, 후금의 정예기병대 3만 6천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니 정묘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후금의 병사들은 기동력을 이용하여 파죽지세로 내려왔고, 1월 27일 인조와 주력부대는 강화도로 이동한다. 그러나 명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던 후금이 조선과 화친을 하고 물러감으로써 전쟁은 끝이 나고 만다.

 

나. 왜! 인조는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당했나?

그러나 후금은 청(淸)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청태종이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대군을 보내겠다고 위협한다. 결국 1636년 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인조 임금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삼전도 굴욕을 당한다.

삼전도비

그런데 정묘호란에서 건재했던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처참히 무너진 것일까? 그 이유는 정묘호란에서는 인조 임금과 주력부대가 강화도로 이동했으나, 병자호란에서는 왕자와 비빈, 종실, 고관의 가족들이 강화도로 들어간 반면, 인조와 세자, 백관 등은 청군에게 강화도로 가는 교통로가 차단되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씨도 문제였지만 남한산성은 식량과 무기가 턱 없이 부족했다.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강화도로 몽진한 조선정부! 조선정부가 이렇게 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고려가 여몽전쟁 당시 강화도에 강도(江都)정부를 세웠던 역사적 사실을 고찰해야 한다.

 

 

■ 고려조정과 조선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유

가. 왜 고려조정은 강화도로 천도(遷都)했나?

1231년부터 시작된 여몽전쟁은 이후 6차에 걸쳐 30여 년 간 지속된다.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고려조정이 취한 행동은 강화도로 천도하는 일이었다. 이후 고려조정은 천하무적이었던 몽골군을 30여 년 동안 막아낸다. 고려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경기만은 정치적 교섭, 교역, 군사작전을 막론하고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2. 경기만을 장악하면 하계망을 이용하여 한반도 중부지역을 통합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경기만 가운데에서도 가장 넓은 곳이 바로 강화도로 이어지는 곳이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강화도가 혈구(血口), 해구(海口) 등으로 불린 것이다.

3. 강화도는 개경과 한양의 방위와 해상방어의 요충지, 해상진출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곳이며 서해연안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제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그래서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방편이자 최대의 대몽전략이 강화도 천도였다.

4. 조운(漕運)의 편의성이 고려되었다. 조운과 조세의 통로인 해양운송로의 길목이 강화도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육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이북으로 진주하였지만 군량을 수송하던 수군(水軍)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함대에 막혀 결국 일본이 패전하게 된 경우를 보더라도 서해안 연안의 조운 항로는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강화도가 있는 경기만은 예로부터 ‘사람의 숨구멍과 같은 중요한 곳’이라 하여 인후지지(咽喉之地)라 불렀다.

나. 몽골군이 강화도를 정복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

그리고 또 한 가지, 몽골군은 강화도를 공격해서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강화도에서 당시 집권자 최이(崔怡)의 사병과 정규군, 삼별초 등, 수만 명의 병력이 1천여 척의 함선과 함께 섬을 방어하고 있었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어지는 세 겹의 성곽이 건설되었으며, 섬의 연안에는 제방을 쌓아 적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천하무적으로 통하던 몽골군도 바다에서의 싸움만큼은 자신이 없었던 데다 철저히 방비를 갖춘 강화도를 공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던 만큼 강화도는 실제로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다. 조선조정이 강화도로 몽진한 이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청)군도 몽골군과 마찬가지로 기마병이 주가 되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점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군의 재침략이 있던 병자호란에서 청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게 되고, 이로써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때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묘호란 당시 청(후금)군이 강화도를 건너지 못한 것을 알고 방비를 허술하게 했던 조선군의 태만과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수전(水戰)에 강한 명나라 수군(水軍)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를 장악하면 개경과 한양은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며, 조선정부는 강화도를 청군에 빼앗김으로써 항복한 것이다.

4부가 곧 이어집니다....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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