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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육십 여덟번째'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소통 열음, 인성 열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배제의 ‘배’에서 배려의 ‘배’로

다 나이고 다 너이다

나만 살려 하고, 나만 사람이려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나가 아닌가? 너는 나에겐 너지만 너에겐 나가 아닌가? 너가 너에게도 너라면, 너가 자신을 지칭할 때 ‘너’라고 하고, 나를 지칭할 때 ‘나’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가 너를 나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처럼, 너도 하나의 나로서, 너에겐 너인 나를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인가?

혹은 이쪽의 나와 그쪽의 나는 같은 나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이쪽의 나는 그쪽의 나를 부정할 수 있지만, 그쪽의 나는 이쪽의 나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어찌됐든, 나만, 내 관심만 생각하고 내 이익만 보고 싶다는 뜻인가? 그리하여 ‘그냥 힘으로만 하자’는 얘기인가?

우리는 모순(矛盾)의 뜻을 잘 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다는 창과 가장 단단하다는 방패를 동시에 선전하며 파는 사람에게,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으면 뚫릴 것이냐 아니냐를 물었다. 이런 뚫음과 안 뚫림의 동시가 불가능함에도 가능하다 할 때, 모순이라 한다.

아무래도, 나만 나이고 나만 사람인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나만 나이려 하고 나만 사람이려 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나만 나일 수 있고 나만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외부의 사물은 늘 지칭을 당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나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사람 이름에서도 누가 불러도 같은 이름이 있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이름이 있다. 누가 불러도 같은 이름은 자신과 남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남이 붙여준 이름이다.

갑돌이는 자신을 ‘갑돌이’나 ‘나’라고 부른다. 갑순이도 같은 갑돌이를 ‘갑돌이’라고 부르지만, ‘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갑돌이를 ‘나’라고 부르지는 못하는 갑순이도 자신을 지칭할 때는 ‘나’라고 부른다. 남이 지어준 갑돌이의 이름은 갑돌이의 전유물이지만, 갑돌이 자신이 부르는 이름 ‘나’는 갑돌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래’ 갑순이는 갑돌이에게는 ‘너’였고 ‘너’라고만 불리었는데, 이제 갑순이 자신이 자신을 부르니, ‘너’는 ‘나’로 변한다. 고유명사 ‘갑돌이’는 객관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름이지만, 대명사 ‘나’는 주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이름이다.

말이 표현하는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다. 말하는 자에게 가까운 것을 ‘이것’이라고 하고 먼 것을 ‘저것’이라고 하듯이, 자신을 ‘나’라고 하고 상대를 ‘너’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만 나이다. 내가 너를 나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나만 살지는 않는다. 많은 나들이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다 나다. 그리고 다 너다. 그리고 나만 사람이 아니고, 나의 입만 먹는 입, 말하는 입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 사람이다. 입은 다 입이다. 그러니 ‘다 사람’으로서, ‘다 나’로서, 다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함께가 ‘큰 함께’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만이 나이려 하고, 내 생각만을 인정하려 하고, 내 이익만을 관철하려고, 남들의 있음을 없음으로 여기려 할 때, 나는 ‘나 중심주의’(ego-centrism, me-ism)에 빠진다. 지구를 중심으로 보는 지구중심주의(geocentricism)도, 중국을 중심으로 보는 중화주의(sinocentrism)도, 특정한 인종을 중심으로 보는 인종주의(racism)도, 남성을 중심으로 보는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도, 인간을 중심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도 모두 일종의 나 중심주의라 할 것이다.

나 중심주의는 위 중심주의, 다수 중심주의와도 직간접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도 사람, 너도 사람, 그리하여 너나할 것 없이 ‘다 사람’이라면, 이는 나와 다른 ‘너’지만, 조사 ‘도’와 함께 ‘다르지만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같음’, ‘같은 다름’. 이는 사람도 존재자, 자연도 존재자라는 생태윤리의 주장으로 더 나아간다. 사람들은 종종 중심을 잡으라고도 하지만,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외적 크기로써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고 중심을 위주로 생각하면서, 주변, 소수, 약자를 누르고 배제하는 이런 중심주의는 원활한 소통, ‘큰 소통’ 그리하여 ‘큰 함께’를 방해하는 걸림돌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모두 중심주의’, ‘서로 중심주의’라면 몰라도... 이는 중심 없는 중심 있음이려니... 중심주의는 일종의 수직주의다. 혹은 수직주의는 일종의 중심주의다.

나도 사람, 너도 사람이며 나의 삶은 너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나만 나’ 속의 ‘함께 같지 않은 함께’를 넘어 보다 ‘괜찮은 함께’의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야 할 것이다. 보다 ‘괜찮은 소통’으로 우리는 보다 ‘괜찮은 함께’에 대해 함께 생각을 열고 나누고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소통의 크기도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맥락에서 물어질 수 있다. 그리고 함께의 크기는 함께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 결국은 함께 사는 사람들 개개인의 행복크기, 사람크기, 삶의 크기를 키우는 맥락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큰 우리’, ‘큰 함께’는 다시 나 홀로의 삶의 크기, 사람크기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다 ‘괜찮은 함께’의 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공공선 내지 사회정의도 이야기될 것이다.

보다 괜찮은 ‘따로’를 위한 보다 괜찮은 ‘함께’를 생각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보다 괜찮은 함께를 위한 보다 괜찮은 따로를 생각한다는 의미? 어쨌든, 사회와 개인에서처럼 함께와 따로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닐까? 적어도, 개인 없는 사회 없고 사회 없는 개인이 없음은 확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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