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열음, 인성 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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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배제의 ‘배’에서 배려의 ‘배’로
밀어-내기, 끌어-들이기
사람들은 ‘밥’이 없거나 ‘법’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노자는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아서, 높은 것은 내리고 낮은 것은 올리며,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메우니,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메우나, 사람들의 도는 그와는 달리 부족한 데에서 덜어 남는 데를 받든다.’며 탄식한다. 묵자는 ‘남는 힘이 있어도 서로 수고해주지 않고, 남아 썩어가는 재물이 있어도 서로 나눌 줄을 모르며, 훌륭한 진리가 있어도 서로 가르쳐주지 않으니, 천하의 어지러움이 금수와 같다.’며 이성이 있는 존재와 없는 존재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탄식한다.
둘은 모두, 함께 혹은 함께 나눔의 ‘작은 크기’를 말하고 있다. 탄식만 할 일이 아니다. 실천이 필요하다. 이론과 개념이 있는 실천이... ‘앎 있는 함’이듯, ‘함 있는 앎’이 아니던가?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한다. 나는 바깥세상에서 남들과 싸우지 않기 위해, 내 안에서 나 자신과 미리 싸워 자신을 이겨(克己) 예로 돌아간다(復禮)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있을 때, 나는 남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남들도 하게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남들에게 하게 하지 말라고도 말한다. 남들만을 위해서 그러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들을 위할 때, 남도 나를 위할 수 있을 것이며, 남과 함께 할 때, 나 홀로도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는 인군이 자기 ‘혼자’만 생각한다면, 그는 영원히 홀로되어 더 이상 ‘홀로의 자리’, 일인자로서의 지위에 설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사회적 혹은 사회에 의해 생성된 유능’을, 그의 ‘타자들’, 그의 ‘사회적 무능들’과 나누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삶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락(獨樂)을 비판하는 맹자의 동락(同樂) 개념은, 결국 하나의 ‘수직주의적 함께’ 내지는 ‘거리 없음 속 거리 있음’의 한계를 부분적으로만 넘어설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도 함께 보여준다.
순자가 군주의 배를 지지하여 띄워주는 것도 강물이지만, 군주의 배를 뒤엎는 것도 강물이라 했음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리가 높아도, 재산이 많아도 군림, 전횡(專橫), 독재, 독단(獨斷)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실, 자리가 높고 재산이 많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미 ‘너무 나뉘고서’ 전횡을 피하자는 주장에 이미 모순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너무 나뉘지는 말자는 뜻? 아니면, 나뉘지만 내지 나뉨 속에만 함께하자는 뜻?
자리가 ‘높아도 낮아야’ 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함께 살기 위해서라면, ‘일정한 방식’ 속에서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세 사람도 모두 나누는 함께 혹은 함께하는 나눔의 방식을 말한다.
나누며 함께하는 삶에서 찾아지는 예(禮)의 크기는, 일단은, 남, 다름 혹은 약자에 대한 배려의 크기요, 남, 다름, 약자와 소통할 수 있음의 크기라 할 것이다.
과거 신분제의 예 역시 남을 배려함이지만, 그 때의 남 배려는 힘 있는 위 위주일 때가 많아, 배려의 ‘배’(配)는 쉽게 배제의 ‘배’(排)로 바뀔 수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수평적으로 같이 하는 삶이 큰 가치로 생각될 수 없었다. 과거 신분제의 예 담론과 실천은 윗사람들을 중심으로 말해지고 들어지며, 세상크기로부터 많이 고립된 개인의 내면문제에 많이 갇혀 있었다.
여기에는 수직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연약함도 가지고 있는 예 자체에도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예의 태생은 ‘기존의 수직’ 내지 ‘수직의 기존’을 많이 배려함에 돌려진다.
그러나 이런 예에는 ‘기존과의 같음’에 ‘아니오!’하는 노자1의 요소와 ‘기존과의 다름’에 ‘아니오!’하는 노자2의 요소가 그때그때 일정한 방식으로 섞인다 할 것이다. 기존의 수직 분리를 모체로 하는 가운데에서도 다름과 약함을 배려하는 ‘비판적 이성’이 그 속에 일정한 방식으로 들어있어서다.
예를 수평화하면서 이런 ‘비판적 이성’의 크기를 키울 필요가 있다. 외적 크기에 의한 혹은 외적 크기에 대한 아무런 부담이 없음 속에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만남과 소통의 법인 ‘미래의 예’, ‘열린 예’, ‘수평 예’는 ‘다 사람’, ‘더 사람’의 가치와 기치 속에 아래와 약자의 배려 내지 다름의 배려 문제를 함께 배려하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태도이다.
이는 원활한 소통의 전제이자 동시에 결과라 할 것이며, 나아가 사람크기와 세상크기를 함께 생각하는 방법일 것이다. 세상크기를 떼어놓고 사람크기만 따로 묻지 않으며, 사람크기를 떼어놓고 세상크기만 따로 묻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람크기의 키움을 위한 세상크기의 키움이지만, 세상크기의 키움은 다시 사람크기의 키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열린 예, 수평 예는 ‘균형 잡힌’ 권력관계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서, 함께 사람다울 수 있는 ‘수평적 함께’를 지향하는 만남과 소통의 방식이자 자세다. 다 사람을 전제하는 수평 예, 수평 소통은 더 사람을 지향한다. 혹은 더 사람을 전제하는 수평 예, 수평 소통은 다 사람을 지향한다.
소통 열음과 인성 열음이 함께 이야기되는 대목이다. 만남의 한 방식인 과시는 ‘나를 올려 보이는(示)’ 태도이고, 또 다른 한 방식인 무시는 ‘남을 내려 보는(視)’ 태도다. 나를 크게 보이든 남을 작게 혹은 급기야 없이 보든, 이들은 결국 나 중심주의로 이어질 것이다.
이에 비하여, ‘나를 내려 보이고 남을 올려 보는’ 다름 배려인 예, 특히 수평 예는 다름과의 만남, 다름과의 소통 그리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같은 사람으로’ 함께 살기로 향한다.
불통이나 폭력과 함께하는 배제 내지 배척의 ‘배’(排)는 밀어-내기지만, 소통 내지 예와 함께하는 배려의 ‘배’(配)는 끌어-들이기다. 배제의 배는 떼어내기지만, 배려의 배는 만나기, 짝하기, 함께하기이다. 아니라고 틀렸다고(非) 밀어냄(手)이 배(排)요, 술병(酉)을 내(己)가 끌어-들이며 짝함이 배(配)이다.
‘밀어-내고 떼어-내는’ 배와 ‘끌어-들이고 짝하는’ 배 사이에서, ‘소통 열음 속 인성 열음’, ‘인성 열음 속 소통 열음’의 ‘이통치통’(以通治通)이 이야기된다. ‘이통치통’은 말 그대로 소통으로 소통을 다스리고 돌아보는 일이다. 4절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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