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열음, 인성 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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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역지사지 그리고 여행 - 갑돌이가 아니야, 갑순이야
같음에만, 나에만 붙들려 견문이 좁아 생각까지 막혀 있는 자를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라 부른다 했다. 개구리가 크게 제한된 환경에 갇혀 있고 붙들려 있다는 뜻이다. 똑같고 익숙한 것들로만 둘러 쌓여있는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는 볼 수 있는 공간이 강하게 제한되어 있어, 우물 밖의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커녕 바깥 세계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제한된 시야(視野)와 ‘청야’(聽野)에 따른 제한된 경험과 더불어, 그 생각크기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할 따름이라면서, 보통사람들의 붙들린 판단을 벗어나려 하고 벗어나라 한다. 늘 노자2를 고민하고 넘어서려는 노자1이다. 다름을 ‘No!’로 밀어내는 노자2는 일종의 우물 안 개구리일 것이다. 우물 밖에 있는 우물 안 개구리... 삶은 다름들과의 함께이고 나눔인데... 그리하여 소통인데... 밖의 안 개구리... ? ! .
보고 듣고 배운 것에 갇혀 있는 보통의 우리들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세계가 우물로부터 보이는 하늘보다 약간 넓을 뿐이다. 사람들 각자의 ‘우물 경계(境界)’는 세상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나, 경계(警戒)가 삼엄한 감옥에 갇혀있지 않는 한, 이 경계는 자신에 의해 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자신은 다시 환경에 크게 결정되지만...
감옥은 본래 힘 있는 자들이, 그 힘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그들의 눈에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혹은 여기고 싶은 힘없는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그들의 있는 힘으로 심하게 제한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외적인 감옥은 떠나려 해도, 내적인 감옥은 가둠이라 생각하지도 탈출하려고도 않는다. 아니, 그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탈출을 도우려면 오히려 화를 낸다.
자신이 자신에게 만든 감옥은 내적 감옥이리라. 결국은 밖에 의해 생긴 안의 감옥이겠지만... 자신의 끈으로 자신을 묶는다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생각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인정도 않으려 하고, 별로 보려고도 알려고도 않는다. 아니, 나아가 밀어내고 눌러 내린다. 그러니 노자2다. 이들 작은 경험크기와 작은 생각크기는 서로를 제한하지만, 생각의 크기는 결국은 시야와 청야의 경험에 우선권을 양보한다.
아무리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우겨 봐도, 다름을 보고 나면 다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보고 인정할 때는, 종종 ‘어라, 이상하다~.’라고 한다. 그래서 봄, 경험 혹은 다름 만남이 중요하다. 다름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간과 쓸개의 거리도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의 먼 거리이고, 같음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만물이 다 같은 것이라고 공자가 말했다고 장자는 말했다.
나의 관점을 떠날 때, 나만 나가 아님을 알게 되고, 너도 하나의 나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내 생각만 인정하려 하고, 내 이익만 관철하려 하고, 남들의 있음을 없음으로 여기며 무시하려 할 때, 나는 ‘나 중심주의’에 빠진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자신과 맞추어보고 자신과 다르면 쉽게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밀어낸다. 아니어서 밀어내는지... 밀어내려 아니라 하는지... 그러나 ‘나만이다.’ 혹은 ‘나만 있다.’는 아니다. 나만 맞다, 옳다, 존재한다, 존재하여야 한다면, 이는 내가 기준이고 척도(尺度)라는 뜻이다. 나만 내가 아니므로 혹은 나는 홀로가 아니므로 모순이라 했다.
승용차를 여럿이 함께 타고 가는데, 운전자가 트로트만, 클래식만 혹은 포켓걸스의 노래만 들으려 할 때, 작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아니, 듣지 않을 때도, 서로 자신의 음악만이 좋다고 하면서, 남들까지 내 음악을 좋아하라면서 남들을 ‘나-화(化)’시키려 한다면, 남들은 자신들이 강제당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듣기 싫은 것이 있고, 듣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보기 싫은 것이 있고, 보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과 다르면 밀어내거나 자신과 같게 만들려 한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만-이려 한다. 자신이려 함이 남들까지 자신-화함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남이 남-이려 함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남들의 나-화는 너도 ‘같은 나’이다가 아니라, 너는 ‘나와 같아져’ 나를 따라야 함으로 나아가기에 문제로 된다. 앞은 ‘수평 같음’이요, 뒤는 ‘수직 같음’이다. 나-화는 수직화, ‘위-화’로 쉽게 이어진다.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에 전교에 풍금(風琴)이 한 대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 시간이 되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끙끙대며 이 풍금을 이 교실에서 저 교실로 옮겨간다. 피아노를 말로도 듣고 그림에서도 보았지만, 풍금과 어떻게 다른지 도저히 구분할 재간이 없었던 시절이다.
어쩌다 학부형들을 모시고 학예발표회를 열면, 합창의 중창 하모니가 낯설어 음이 왜 서로 안 맞느냐고 묻는 분들도 나온다. 다른 것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겐, ‘다른’ 것은 이상(異狀)함을 넘어 쉽게 이상(異常)하고 ‘틀린’ 것으로 여겨진다. 다름이 틀림으로 이행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니, 이들을 꼭 틀렸다고만 하는 생각에 틀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異狀)함과 이상(異常)함의 시원(始原)을 함께 합리적으로 추적하면서 생각을 열어갈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고대 중국의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는, 사람들은 미인이라 하지만, 물고기나 새의 입장에서는 숨고 피하는 대상일 뿐이다. 생각과 판단은 입장에 따라 상대적이니, 다름을 인정하라는, 아니,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는, 물고기들도 사람들처럼 이들을 아름답다 하고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사람 중심주의’ 내지 ‘나 중심주의’에 갇힌 ‘사람-화(化)’ 내지 ‘나-화’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이런 소통의 태도에는 편견을 넘어 일방과 강제, 나아가 폭력이 숨어 있기 쉽다 할 것이다.
한국인이 표현하는 ‘발’을 독일인이 ‘푸쓰’(Fuss)’라 한다고 ‘발을 푸쓰라 하는 것이 아니잖아!’라 하고, ‘공’을 ‘발’(Ball)이라 표현한다고 ‘바보, 공과 발도 구분 못하니?’ 하며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독일인들에게는 ‘우리와 다른’ 그들의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을 ‘발’(Ball)이라 표현한다고 하여, 그들이 사는 데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인이 말을 할 줄 모른다며, 그들에게 우리말을 억지로 가르치고 독일어를 버리라고 한다면 어떨까? 또, 그 반대는 어떨까?
A가 ‘나는 갑돌이다.’라고 하니, B가 ‘바보! 나는 갑돌이가 아니야, 갑순이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웃을 것이다. 자신에 갇힌 B의 생각크기, 행동크기가 작고 모자라니, 사람들은 이런 ‘우물 안’을 웃는 것이다. 우물 안이 웃는 우물 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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