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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의 비밀 - 그 위대한 역사 (세번째 이야기)상투는 민족의 상징이었다

■ 상투를 튼 한민족의 이주 역사

한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상투! 그런데 상투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국 섬서성 서안(西安)에 있는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에 있는 도용을 보면 모두 머리를 빗어 머리꼭대기로 틀어 올린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이 상투머리를 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강족(羌族)이라고 하며 이들은 원래 북방유목민족이었다고 한다. 상투를 틀었던 강족, 혹시 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은 아니었을까?


또한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의 후예로 알려진 중국의 묘족은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살고 있

상투를 튼 태호복희씨와 여와 / 상투를 튼 아즈텍인들

는데 그 중의 하나가 상투머리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상투머리를 하고 있는데, 여성의 경우 우리나라 여성의 쪽머리와는 다르게 앞쪽으로 머리를 모아 틀고 있다.


하도를 천수상하고 팔괘의 획을 그은 인문의 시조, 태호복희씨.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그림에 나타난 태호복희씨는 상투머리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상투를 튼 모습은 멀리 남미에서도 보인다. 남미의 아즈텍 문명을 연 사람들은 수백 년 전 베링해협을 건너 간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는데 그들이 사용한 나와틀어는 우리말과 비슷하다고 하며 생활양식도 공통점이 많다고 한다. 특히 상투를 튼 그들의 모습에서 한민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상투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상투를 통해 한민족의 이주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 변발과 우리민족의 관례

고려 공민왕(1330~13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말을 탄 귀족남자가 개체변발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민족의 상투와 북방 기마민족의 변발이 혼합되는 일이 발생한다. 변발을 했던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던 고려·페르시아·중국 일부에까지 변발 풍습이 퍼진 것이다.


몽골과의 오랜 항쟁이 끝난 후, 1272년(원종 13) 혼인문제 때문에 원에 갔던 세자 심(諶)은 몽골 풍속에 따라 변발에 호복(胡服) 차림으로 돌아왔는데, 이를 처음 본 백성들이 매우 해괴하게 여겼으며 이를 슬퍼하여 우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로 원 황실과 처음으로 통혼한 충렬왕(忠烈王, 1236~1308)이다. 그는 재위 4년(1277) 개체령(開剃令)을 발표하여 나라 전체에서 개체변발을 하고 몽골의복을 착용할 것을 명한다. 이후 개체변발은 공민왕 원년(1389) 개체령 해제까지 100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이 모두 따른 것은 아니고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바라는 일부 지식층에서만 호응했다고 한다.


“공민왕 원년에 변발호복은 우리 선조의 제도가 아니라는 신하의 말에 변발을 풀었다.” 『거가잡복』
“원(元)을 섬긴 이래 개체변발하여 호복을 입은 지 백년이 가까이 오다가 이때부터 고관문물이 완연히 다시 새로워졌다.” 『고려사』


이후 상투와 얹은머리로 되돌아갔으나 원의 영향으로 머리를 땋아 늘이거나 계(髻)로 만드는 것이 보편화되었다.(개체변발은 중간에 머리를 남기는데 이를 겁구아怯仇兒라고 하는데, 몽골어로는 허얼KeKul이라고 한다.)  특히 관례 전 처녀, 총각에게 머리를 땋아 늘인 후 처녀는 홍색, 총각은 검은색 댕기를 늘이게 했는데, 이 같은 형태는 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단지 몽골의 변발과 차이가 있다면 몽골에서는 앞머리를 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앞머리를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의 상투 트는 방법은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잘라내고 남은 머리를 쇠로 만든 동곳을 상투기둥으로 사용해서 묶는 것으로, 이때 머리를 자르는 것을 백호치기 또는 배코치기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어휘에서 온 말로 변발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개체의 풍속이 변발의 풍습으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변발은 관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관례를 민간에서 시행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왕자 책봉이나 가례의 선행적인 행사로 인식되고 민가에서도 결혼시키기 위해 약식으로나마 관례를 했는데, 병자호란 이후부터 유입된 변발풍습이 관례에 큰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관례란 땋아 늘어뜨린 머리를 말아서 올리는 의식이 가장 중요한데 변발로도 행세할 수 있다면 구태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관례를 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어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하였다.(仍飭京外, 年多而不收髮者, 隨現重繩.) (『조선왕조실록』 영조 40년)
‘반백의 노총각이 머리를 땋아 늘인 채 돌아다니며 인심을 광혹하는 자가 많다니 한심합니다. 왕은 명을 내려 수발(收髮)하지 않은 자를 중히 다스리십시오’라고 한 것은 조선에서 변발속의 유행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관례가 아닌 혼례에서 상투를 틀게 되면서 상투는 ‘결혼한 남자이자 성인이 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 한민족의 상징, 상투

일제의 강제 단발령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지키려한 상투! 관례와 혼례에서 틀었던 상투는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과거 머리모양은 각 족속을 구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초상화

하는 증표였다는 것이다. 북방유목민족의 변발이나 한족의 머리모양과 구분 짓는 한민족의 상징인 상투는 홍산문화 시기부터 계승된 우리민족의 고유문화인 것이다. 단발령 이후 상투가 다시 매스컴에 등장하고 대중적인 헤어스타일로 재탄생한 지금, 상투의 참의미를 알고 세계의 헤어스타일로 자리매김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 2부 ‘상투를 지켜라’에서는 우리민족 고유의 칠성신앙과 상투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 글 : STB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김가연 기자  k-gaye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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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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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훈 2023-10-05 17:35:46

    상투가 우리거라기엔좀.... 사람인이상 비슷한 행동양식과 문화는 얼마든지 생길수있음. 그럼 생머리는 누구의 문화인가? 아무나 다할수있음 말총머리는? 발효음식도 다양하게 있고 울나라 갈비찜이나 저짝 어떤나라의 고기스튜나 채소놓고 고기 삶는건 비슷함.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면 좋겠지만.... 그게 글케 될리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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