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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대전으로 본 동아시아 패권의 역사 [4부]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 해양교통의 결절점

 

■ 동아지중해의 각축장이 된 경기만

가. 경기만이 동아지중해의 중핵(中核)이 된 이유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한반도 최대의 만인 경기만은 예로부터 동아지중해에서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기점이며,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결절점이었다. 또한 서해연안항로의 중간 경유지이기도 했다. 더구나 경기만의 주변지역은 농경지가 발달하여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 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하계망과 내륙수로를 통해서 내륙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꾸는 세력은 반드시 경기만을 목표로 항진하였다. 현대판 물류허브이자 하늘의 항구인 인천공항이 들어선 이후 세계 100여 개 국과 한 시간 생활권으로 묶인 것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실제 이곳을 점령한 국가는 해양국가로 발돋움하여 동북아 역사의 주도권을 확보하였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동아지중해에서 국가 간 역학관계의 중핵(中核)의 위치에 있던 경기만은 항상 각국의 힘이 충돌하고, 각축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나. 경기만은 언제부터 각축장이 되었나?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대에 들어 경기만을 완전하게 내해화(內海化)

한다. 이때가 백제의 최전성기로 중국에 대륙백제까지 건설하는 쾌거를 이룬다. 391년,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등극하면서 백제는 396년 고구려의 수륙양면작전으로 경기만을 내주게 된다. 그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여 경기만을 완전히 장악한 장수왕은 475년 한성을 점령한다. 고구려는 이때 동아지중해의 주인공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551년 신라가 한강 상류지역을, 553년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경기만으로 나가는 출해구(出海口)를 확보하고 대중국항로와 물류체계를 획득한다. 이후 신라는 당항진을 대당교통로로 이용하면서 급기야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와 백제․일본, 신라와 당나라가 동아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싸운 동아지중해 최초의 국가대전이었다. 역사는 이처럼 경기만을 획득한 국가가 동아지중해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쥐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근대사의 문을 연 강화도

가. 외세에 문을 연 조선

강화도 초지진 성벽

19세기 중엽, 400년 가까이 명과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 세계의 일원으로 안주하면서 외부세계에 대해 철저하게 쇄국으로 일관했던 조선은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에 직면하게 된다.

1866년 병인년, 대동강을 거슬러 온 미국의 재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사건과 이 해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바라보는 김포의 문수산성을 점령한 병인양요가 벌어진다. 그리고 1871년에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강화해협의 지형과 수로를 탐색하다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 신미양요가 벌어진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일본은 군함을 앞세우고 조선에 개항을 요구함으로써 강화도 조약, 즉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은 외세에 의해 근대세계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런데 이들 제국주의 세력의 공통점은 경기만을 통해 침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옛날 조선이 강화도를 점령당함으로써 청나라에 항복했던 것처럼 조선정부는 일본에 강화도를 점령당하고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나. 조선이 외세에 굴복한 이유

조선의 수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력하고 효율적인 해양방어체계를 구축했으나 개화기를 맞으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조선 후기의 수군은 임진왜란과 같은 대변란이 재발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일사불란한 조직과 많은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평화시기가 길어지면서 수군의 활용도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 실효성에 논란이 일어 숙종 때에는 수군무용론(水軍無用論) 내지 수군감축론(水軍減縮論)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고종 3년(1866)에는 우의정 김병학의 건의에 따라 전선(戰船)의 조운(漕運) 겸용책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전선을 조운선으로 개조하고, 조운선을 전선으로 개조하여 같이 사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결정된 전조선 겸용책도 그 직후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과 프랑스 군함 내침으로 인한 병인양요(1866)가 발생하여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고종은 자금을 하사하여 각 수영의 군선을 개선토록 하고, 해양방어체제를 강화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병인년에 평양 경내에서 소각당한 제너럴 셔먼호의 타고 남은 선체를 한강까지 끌어다 놓고 김두기 등이 그것을 모방하여 목탄증기선을 제조, 시험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수군과 군선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더니, 마침내 고종 32년(1895) 삼도수군통제영과 각도 수영이 혁파되고 수군이 해산됨으로써 전통적인 수군과 각종 군선은 그 명맥이 끊기고 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은 개화기를 맞아 해양의 주도권을 잃고 열강의 눈치만 보게 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5부가 곧 이어집니다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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