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열음, 인성 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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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역지사지 그리고 여행 - 떠날 때 만날 수 있다
열음은 남 인정 내지 다름 존중의 시작이니 ‘좋은 함께’로의 시작이다. 다름이 같음에로의 시작이란 뜻일까? 함께(-)란 말은 ‘하나’ 혹은 ‘같음’에서 나온다. ‘열음’은 늘 다름에의 열음이요, 함께는 늘 다름과의 함께다. 또, ‘열음’은 만남을 전제하는 떠남이다. 만날 때 떠날 수 있지만, 또, 떠날 때 만날 수 있다. 다름 만남은 같음 떠남을 전제한다. 그러고 보니 만남도 늘 다름 만남이다. 늘 떠나는 만남이니까...
열음은 같음/나를 비우고, 같음/나를 내려놓고, 같음/나로부터 한 발 거리를 두려는 자세다. 그렇다면 이는, 조금은, 있는 나를 없게 하는 일이다. 사람마다 정도와 색깔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는 지금여기의 나 혹은 이런 나의 인적, 물적 환경에 많이 갇혀 있고 채워져 있으며 붙들려 있다.
내 생각만 인정하고 내 이익만 관철하고 남들 있음을 없음으로 여기면서 나는 나 중심주의에 빠진다. 혹은 내가 나 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면, 나는 내 생각만 인정하려 하고 내 이익만 관철하고 남들이 있음을 없음으로 여기려 하게 된다. 앎의 차원에서든 함의 차원에서든, 나 중심주의, 특히 남을 해치는 나 중심주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문을 열어야, 내가 나가든 남이 들어오든, 나와 너는 격리나 유리, 분리됨이 없이 소통하면서 진정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너가 진정으로 만날 때, 나와 너는 ‘좋은 함께’ 속에 ‘더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남들/다름들도 인정함은 ‘다 사람’의 자세다. 나아가 ‘다 삶’, ‘다 존재’의 자세다. ‘다 사람’은 ‘더 사람’으로 향하게 한다. 혹은 ‘더 사람’은 ‘다 사람’으로 향하게 한다. 함께의 크기는 결국 사람크기 혹은 개인 크기의 문제라 할 것이다.
다름 만남은, 다시, 같음 떠남을 촉진한다. 같음에 거리를 두면서 다름을 만날 때, 같음에 갇힘의 문제가 보다 명료해진다. 같음에 갇혀 이를 지당하다고만 할 때, 무리(無理)가 따른다.
같음이나 유리(有利)에 붙들려 있거나, 위에 눈치 보고 다수에 눈치 보면서, ‘상심’(上心)과 ‘중심’(衆心)에 영합하면서 이와 같아짐은 동시에 이에 갇혀짐이기도 하다. 그러니 노자2는 쉽게 계속 노자2이게 된다.
소수의 다름이지만 이 다름은 같음에 굉장한 창의가 될 수도 있으며, 아래의 다른 생각들은 위의 같은 생각을 풍성하고 기름지게 해줄 수도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할 수 있는 시대적 토양이 없었다면, 그렇게 몇 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행동을 결정해온 풍성하고 창조적인 사상들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들은 물론,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갈릴레이(Galilei, 1564~1642)의 지동설이나 12억 뷰(view)를 넘는 싸이(Psy, 본명 박재상, 1977~)의 비디오도 모두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다름이기’, ‘다름일 수 있기’의 효과라 할 것이다.
창의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조건들의 연구 및 응용은, 이윤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경영기법에서도 많이 도입하는 추세다. 하나의 판단이 완전할 수 없는 한, 이런 불완의 판단을 기워주고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은 같음에 머물 때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자유롭게 찾고 만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함께의 개인행복을 찾고 이루기 위해서, 나, 너, 나와 너, 우리는 같음들에 붙들림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나와 같음에 갇힐 때, 남을, 다름을 어떻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을까? 갇힌 이들과 어떻게 함께 말하면서 평화 속에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을까?
남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배려 혹은 인정하지 않고도 나의 행복이 가능하다면, 생각과 소통, 나아가, 삶의 ‘왜곡’ 속에서만 혹은 일시적으로만 가능하다 할 것이다. 인성과 소통이 함께 말해지는 까닭은, 참다운 소통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를 전제하고도 결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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