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당일, 순국의 길을 택하다
홍범식 선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후기 정조대왕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집안이였죠. 조선후기 대푲거인 명문가 집안으로서,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의 교리였던 성리학을 공부하던 학자였기에 선생은 충효와 의리를 최고의 덕목이자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 |
17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4살이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소식에 비분강개하게됩니다. 그러던 도중 선생은 태인군수로 임명이 되었으며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모든 것을 다해 설득하고 막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태인군에 있던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일본군 수비대가 학살과 폭력을 일삼았기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군수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은 마을마다 선생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그 수가 무려 38개에 이르게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홍범식 선생의 인품과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발생한 사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게됩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한가지는 친일파 이완용과 밀접한 관련이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아 잘 모르실겁니다. 1909년 12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 처단 작전을 실행하였고 안타깝게도 칼에 맞은 이완용은 살아나게 됩니다.
미수 사건으로 그쳐버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친일단체였던 일진회를 통해 마치 '우리나라가 한일병합을 원한다. 우리는 일본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청원서와 성명서를 발표하게 합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주장하는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는 바로 여기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
선생은 자결,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습니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자결한 모습이 마치 자는 듯 편안한 자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 40세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