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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같음과 다름 사이 - ‘갑-질’, ‘을-질’
따로 함께가 ‘나만이다!’로 환원되면 쉽게 ‘갑질’ 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갑질이란 말이 한국사회에서 유행한다. 갑질의 빈도가 늘어나고 강도가 세어진 것과 함께 비판의 수준도 높아지고 전달의 환경도 좋아진 때문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갑의 횡포로 어려워한다. 갑질은 한국사회의 사람크기를 많이 말해주는 세상크기를 많이 말해주는 말이다.
갑질은 사람관계의 한 특수한 형식이다. 두 경제주체가 법률적으로 계약을 맺을 때, 보통, 강자와 약자의 입장이 ‘갑’(甲)과 ‘을’(乙)로 불리는데, 을에 대한 갑의 일방적(一方的)인 괴롭힘의 부당행위를 깎아내리는 말 ‘-질’을 붙여 ‘갑질’이라 부른다.
그러나 갑질의 정의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함부로’로 일반화된다면, 갑질의 외연은 한없이 넓어진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갑질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누구도 강이기만 하거나 약이기만 한 경우는 없어, 때에 따라 강일 수도 있고 약일 수도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강(强) 자체가 늘 문제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강함이 생기는 방식이나 강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에게 이 강함을 어떻게 쓰느냐 등이 무엇보다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 생성 방식이나 쓰임 방식? 강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모습...
갑질은 강한 내가 나의 강으로 좌우할 수 있는 -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 상대를 ‘함부로’ 막 대하여 ‘못살게’, 나아가 ‘못 살게’ 하는 명백한 잘못이다. 이기주의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남 해침’ 해인(害人)의 이기(利己)가 문제다.
강한 자신의 이해(利害)나 이해(理解), 의지나 감정에 따라서만 약한 상대를 제-멋대로, 제-맛대로 ‘밖’으로 밀어-내고 ‘아래’로 눌러-내리는 갑질은 상대의 삶 행위를 세게 거스르며 ‘못살게’, 나아가 ‘못 살게’ 하는 길이기에, ‘좋은 함께’의 방식일 리 없다.
그런데 시간적 전후나 공간적 좌우를 좀 더 넓혀볼 때, ‘나쁜’ 짓을 자행한 갑의 상황도 나빠지기 일쑤다. 갑질하는 갑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크고 작은 제재(sanctions)를 받기 쉽기 때문이다. 갑질 후의 실직이나 비난, 감옥행이 그 예다.
그럼에도 갑질을 하는 한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서 을로서 더 큰 갑질을 당했기 때문은 아닐까? 갑질 사회에서 갑질이 갑질을 낳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갑질만이 낳는 것도, 갑질만을 낳는 것도 아니겠지만...
갑질은 같이이되 ‘수직적 같이’이다. 이런 함께가 나의 ‘너만이다!’로 환원되면 쉽게 ‘을질’로 나아간다. 을질도 같이이되 ‘수직적 같이’이다. 부당한 괴롭힘을 가하는 갑질도 이를 당하는 ‘을질’도 일단은 수직주의 내지 중심주의의 그물에 강하게 걸려있다.
‘나만’이나 ‘너만’의 함께는 따로가 ‘진정한 함께’를 방해하는 경우다. ‘나만’인 속에 너는 없어지지만, 그래도 함께이기에 ‘나만 속의 함께’가 된다. ‘나 속의 함께’에서는 너도 나와 같은 존재로 함께 존재할 수 있지만, ‘나만 속의 함께’에서는 강한 나가 약한 너를 대등함에서 밀어 내고 눌러 내리는 갑질의 함께만이 존재한다.
나만이고 나만 있으니, 함께의 크기, 사람크기에 아주 나쁜 따로 함께이다. ‘너만’인 경우도 물론 같다. ‘너 속의 함께’에서는 나도 대등한 존재로 함께 존재할 수 있지만, ‘너만 속의 함께’에서는 강한 너가 약한 나를 대등함에서 밀어 내고 눌러 내리는 갑질의 함께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갑질은 ‘위가 아래를 억지로 위에 같게 함’이요, 을질은 ‘아래가 강제로나 자율로 위에 같아짐’이다. 강한 ‘나와 같게 함’인 갑질은 ‘강 나에 따르게 함’이요, 강한 ‘너와 같아짐’인 을질은 ‘강 너를 따름’이다.
‘약 너 없는’ 갑질과 ‘약 나 없는’ 을질은 서로가 서로를 키워준다. 따르기에 따르게 하기가 쉬워지고, 따르게 하기에 따르기가 쉬워진다. 아니, 갑질과 을질은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쪽에서 보고 붙인 이름일 뿐이다.
또한, ‘위와 아래의 다름 속에 위와 아래가 같음’이기에, 위아래 사이의 ‘수직 다름’과 ‘수직 같음’이 말해진다. 수직 다름은 ‘수직 속 다름’으로 ‘수직적 다름’이요, 수직 같음은 ‘수직 속 같음’으로 ‘수직적 같음’이다. ‘수직 다름’과 ‘수직 같음’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아니, ‘거리는 없다.’가 더 나은 표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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