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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후천가을 대한민국의 새 서울, 태전(太田) - 금강문화권의 역사

고구려의 평양 천도, 고려의 개경 천도, 조선의 한양 천도! 천도(遷都)는 옛 땅에 뿌리내려 전통을 유지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풍요의 가능성을 향해 옮겨 가려는 욕구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산물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왕조가 바뀌면 수도를 옮겨 국운을 열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려 한 예가 많았는데 천도가 암묵적으로 지배세력 교체의 수단으로 동원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치자는 천도를 통해 국민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국가의 수도 이전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결단이었다. 수도 이전을 통해 중흥의 계기를 만든 나라도 있었지만 쇠락을 길을 재촉한 나라도 있었다. 그만큼 수도 이전은 국가의 흥망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런데 증산상제님께서 집행하신 천지공사 중 후천가을 대한민국의 수도에 대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느니라.” (도전 5:136)

이 말씀에서 ‘새 세상’이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여름철을 지나 앞으로 맞이하게 될 가을천지를 뜻한다. 그리고 ‘큰 서울’은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후천 대한민국의 수도가 될 ‘작은 서울’은 어디를 말씀하신 것일까? 이에 대해 상제님은 다음과 같이 태전(대전)이 후천 통일문명의 수도가 되도록 하신다고 명확히 밝혀주셨다.

“태전(太田)을 집을 삼고 인신합덕(人神合德)을 하리니 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 (도전 5:306)

그런데 2012년 7월 1일, 상제님 천지공사가 현실 역사로 드러나는 획기적인 일이 발생한다. 대한민국 중부에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해 수도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주산인 원수산과 청룡백호인 괴화산, 전월산이 금강과 함께 배산임수를 형성하고 있는 세종시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국토 균형발전의 가치 실현과 서울의 과밀화 해결을 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서울과 과천에 분산되어 있던 9부 2처 2청의 정부기관이 정부세종청사로 이전되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행정의 중심 도시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주도해나갈 세종시가 중부 내륙 충청남북도의 중심지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특별시

금강이 1천리를 흐르며 주변의 드넓은 평야와 분지를 아우르는 금강문화권은 금강의 풍부한 수량과 물길, 비옥하고 드넓은 곡창지대를 품고 있어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곳이다.

이 때문에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금강일대에는 중삼한의 하나인 마한의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4세기 중반에는 백제가 마한지역을 병합하면서 백제의 세력권에 포함된다.

이 지역이 도읍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5세기 무렵 백제가 금강유역으로 남천하면서 부터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도읍인 한성이 점령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475년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한 것이다. 이후 문주왕에서 무령왕에 이르기까지 4대 60여 년 간 웅진시대를 열어 소진한 국력을 회복하려 했다.

웅진 천도 30년이 지난 무령왕대에는 바닷길로 해외의 중국 남조와 왜 등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일찍부터 발달한 농경문화는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으며, 평야지대를 아우르며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의 뱃길은 일찍부터 해외로 열려져 있어서 중국 문화를 수용하는데 편리한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는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수용한 외래문화를 토착문화에 접목시키면서 백제 특유의 세련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풍납토성(좌), 공주산성(중), 부소산성(우) 모습

무령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높아진 왕실의 위상을 기반으로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백제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했다.

백제가 수도를 사비로 옮긴 것은 사비의 배후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지대와 바닷길로 근접한 대외 교류의 이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해바다와 충청 전라 지역의 내륙을 연결하는 금강 줄기는 외부와의 교역과 유통의 젖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강은 넓고 깊어 내륙 깊숙한 신탄진 부근까지 수운이 연결되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때는 금강의 물길을 따라 조세를 거둬들이는 조창과 조운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 천도 후 무왕대에 이르러 중흥의 기회를 다시 맞는 듯 했으나 의자왕대에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결국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후 금강문화권은 9세기 말,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지만,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후백제의 근거지였던 이곳 출신들은 오랫동안 중앙 진출이 차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왕건이 후백제의 땅인 연산에 개태사를 창건하여 후백제인을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

훈요십조

하고자 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백제 세력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가 죽기 직전 남긴 훈요십조 제8조에 ‘차령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은 산의 모습과 땅의 생김새가 모두 등을 돌려 나라를 배반할 형상이므로,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을 내리지 말라’는 경계가 그것으로, 금강과 계룡산은 개경으로 화살을 날릴 활과 같은 배역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훈요십조의 이러한 내용은 풍수에서 기인했다기보다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왕건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훈요십조는 고려의 후대 왕들에게 통치 지침으로 계승되면서 이 지역 출신들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지승용 기자  jsr68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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