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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후천가을 대한민국의 새 서울, 태전(太田) - 조선의 천도(遷都)

즉위 후 불과 26일 만에 한양천도를 명하다

 

사진 유첨=중앙시사메거진, 김준태의 왕의 결단(24) 삽화 캡쳐

 

그런데 중국의 원과 명이 교체되면서 국내외 정세가 급격히 변동하던 14세기 후반, 백제 멸망 후 천여 년이 다 되도록 나라의 변방으로 취급받았던 차령이남 지방이 우리역사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392년, 위화도 회군 후 군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즉위 후 불과 26일 만인 8월 13일 도평의사사에게 한양 천도를 명한 것이다. 나라를 세우면 먼저 국호를 제정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천도문제를 우선순위로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가 평화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우왕 14년인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하고, 국내의 정치 상황에 따라 4년 넘게 많은 정적들과 죽음을 넘나드는 대결을 연속적으로 치러야 했다.

즉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외교문제를 비롯하여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 대처하면서 그의 위치를 드러냈고, 대내적으로는 우왕 때의 권신 이인임, 조민수, 최영과의 암투 및 사전개혁과 관련하여 이색, 정몽주 등과의 갈등과 견제 및 숙청 속에서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중 등 급집 개혁파들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무력전쟁이나 사회혁명이 아닌 고려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왕권 교체도 고려 군신의 추대를 받아 7월 17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는 독특한 형식을 띠었다. 그리고 전장 제도도 모두 고려의 것을 그대로 쓰기로 하여 마치 고려왕조의 연장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심지어 개국 후에도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다 즉위 2년이 되던 1393년 2월에야 조선으로 고쳤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고려의 신하로서 왕을 내쫓고 새 왕조를 연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개경은 500년 간 고려 구세력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왕조가 교체된 이상 국가의 면목을 새롭게 하고 민심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직후에도 명당으로 인정받던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로 옮기는 문제는 이성계 앞에 놓인 큰 과제 중 하나로 시대적 흐름과 민심의 향배가 천도 승패의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에게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한양 천도 논의는 조선 유교사회로의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자 새로운 시대의 도약을 알리는 상징이요 결정체였다. 이런 생각에서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불과 26일 만에 한양천도를 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양 천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성강 하구의 매몰로 조운(漕運)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조나 조선조가 마찬가지로 영남미 10만 석과 호남미 10만 석이 나라 재정의 전부였다. 이것으로 관원들의 녹봉도 주고, 사업도 하고, 경비로 쓰고 했다.

그런데 이 쌀은 조운으로 예성강으로 들어와 개경으로 운송되게 되어 있는데 고려조 후기부터 예성강 하구의 매몰로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천도 후보지로 먼저 선택된 곳이 한양이었다.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한 것은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는 수로 교통의 편리함과 북한산을 비롯하여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지를 이루고 있다는 인문지리적인 측면과 국토 중심에 있어 효율적인 지방 통치에 유리하다는 입지조건 등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조정 신료들 가운데는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나 천도에 대해 이미 확고한 태조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1392년 8월 13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에게 고려시대 내내 주목되었던 고려의 3경 중 하나인 남경, 즉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하고 이틀 뒤에는 삼사 우야복 이염을 보내 옛 궁실을 수리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보름 후인 9월 3일 개국공신 시중 배극렴과 조존 등은 태조에게 천도 연기를 주청한다. 이로써 한양으로의 천도 시도는 궁궐과 성곽 완성 이후로 미루어지며 태조의 첫 한양 천도 시도는 20일 만에 중지되고 말았다.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였고 성곽이 완성되지 못하여서 호종하는 사람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오고 백성들은 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데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_『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그런데 이 무렵 계룡산이 왕도의 기가 서려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도읍지로 추천되면서 정치적

신도안 풍수

으로 주목되기 시작한다.

태조 2년인 1393년 정월 정당문학 권중화가 태실증고사로 왕실의 태실을 물색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에 다녀오면서 ‘계룡산 도읍지도’를 그려 태조에게 바친 것이다. 권중화의 보고가 올라오자 태조는 친히 계룡산을 답사하기 위해 1393년 2월 19일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개성을 출발한다.

이틀을 걸려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도착한 태조는 무학 왕사를 청하여 함께 동행하였다. 개성을 출발해 10일 만에 계룡산에 도착한 태조는 직접 5일이나 머물면서 산수의 형세를 관찰하였다. 친히 신도안 중앙의 중봉에 올라 새 도읍지가 될 주위의 형세를 살펴보고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지 바로 신도읍 공사를 지시하고 환궁하였다.

그러나 3월부터 10개월 가까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신도읍 건설 공사가 그해 12월 1일, 갑자기 중지되는 일이 발생한다. 경기 좌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의 풍수적 결함에 관한 진언을 올린 것이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인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지금 듣건대 계룡산 땅은 건방(乾方, 서북방)에서 오고 물은 손방(손방巽方, 동남방)으로 흘러간다 합니다.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水破長生 衰敗立地]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치 못합니다.”_『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 글 : 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지승용 기자  jsr68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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