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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태일의 『한문화 산책』 - 이승만의 반역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는 임정요인들의 눈물겨운 기록을 볼 수 있다.

 극도의 재정난으로 임시정부는 정부청사를 초라한 어느 개인주택으로 옮겼으나 집세도 내지 못해 온갖 수모를 당하는가 하면 전차표 검사요원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교포 집을 떠돌며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더구나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면 패가망신한다는 풍조가 퍼지면서 더욱 궁지에 몰린 임정요인들은 해외동포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다행히 호응이 커서 피맺힌 자금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온 세계를 놀라게 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장거를 실행할 수 있었고 두 의사의 장거로 한국문제는 비로소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특히 중국인들의 한국교포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은 우리민족에게 또 하나의 시련을 주어 민족정기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스스로 해방을 찾지 못한 대가로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고 민족역사를 회복하는 일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진주한‘하지’중장은 군정을 선포했고 한국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전적으로 일본인에 의지하였으며 심지어‘조선총독정치’를 그대로 존속하려 했다. 그들은 36년간 핍박과 수탈을 당한 우리민족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참고= kimstreasure 동화, 친일파가 싫어요 中,

 정치적으로도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적 기반이 없었으므로 친일세력을 감싸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후의 이 나라의 성격과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민족정기 회복을 갈구했던 국민적 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임정요인들의 거취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미군정은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할 생각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보호했다.

 그 증거로 1947년 7월, 미군정하의 입법기관인‘남조선 과도 입법의원’들이「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 통과 시켰으나 미군정의 동의를 얻지 못해 끝내 무산되고 만다.

 이와 같이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오히려 중용함으로서 이 땅의 민족정신을 혼탁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처리 과정에서 친일파 기업인들에게 불하함으로서 온갖 부패가 싹트고 경제윤리마저 타락시켜 정상배들이 날뛰게 했다.

 미군정 3년이 끝나고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서자 친일파 숙청에 대한 빗발치는 국민여론에 의해 특별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국내 정치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파 관료를 하나둘씩 포용, 정부의 요직에 등용한다. 따라서 국회 내의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발의가 일자 친일관료를 거느리고 있던 이승만으로서는 국회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국회와 친일파를 싸고도는 이승만 정권과의 반목과 견제, 체포와 방해공작의 지루한 소모전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관료들의 집요한 방해공작도 정부의 두둔 하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반민법이 그들의 집요한 공작에도 국회를 통과하자 일제하에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괴롭혔던 악질적인 왜경출신의 경찰 고위직들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들은 반민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으로 어떻게 하든지 반민특위의 손길을 피하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1월부터 친일 반역자들에 대한 특위활동이 계속되자 이들 경찰측에서는 특위 관계자들의 암살음모가 꾸며지기도 했다. 그간 애국지사를 고문 학살한‘노덕술’이란 일제 고등계형사를 체포하자 이승만은 특위위원을 불러 노덕술은 건국공로자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특위위원들은 항일애국자를 고문 학살한 그는 도저히 석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이승만은 특위활동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위활동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비난과 방해와 협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위는 계속해서 민족반역자를 잡아들였다.

 마침내 정부의 비호 하에 친일반역자들이 규합하여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대규모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터져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강점하고 직원들을 불법 체포하기에 이른다.

 1949년 6월 6일의 사건으로 이를‘6.6사건’이라 한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실시된 친일 반역자에 대한 민족적 심판은 이렇게 이승만의 반역으로 좌절되고 만다. 이로서 민족반역자들은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하게 된다.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처럼 우리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게 되면서 오늘까지도 민족정기를 회복하지 못한 역사의 굴레로 남아있다.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도 함께 박탈되고 말았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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