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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권인규 선생(1843.7.12~1899.11.6) 서거일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구국의병 독립 혼을 지키다

 

헌종 때 태어나 원래는 강릉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유학자로 살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직후 전개된 의병투쟁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의해 을미사변이 자행되고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선생은 비록 나이 먹어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도이(島夷; 섬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맹서하였다. 선생의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척사부정(斥邪扶正)’, 즉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행위로 보았다. 선생은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이 있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민용호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발표하여 지원하기도 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송형순ㆍ이병채 등과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12월 18일(양력 2월 1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李承學) 등 강릉의 토착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선생의 의병활동은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선생의 아들인 권종해는 1907년 후기 의병시기에 강릉에서 거의한 후 이강년의병과 함께 의병투쟁을 벌였다. 또한 선생의 손자인 권기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가족은 일제로부터 가혹한 학살을 당하고 옥고를 겪는 등 피맺힌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아! 우리 5백년 대소 신민들아, 저 왜놈의 극악함은 어찌 차마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강산에는 아직도 두 능(陵)의 원수가 남아 있고, 천지에는 또 8월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설사 그 놈들의 배를 쪼개고 그 놈들의 간을 씹지 못할망정 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깎으며 그 놈들의 호령을 따른 단 말이냐. 원통하고 원통하다.

                                        - 선생의 「창의포고문」 -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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