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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1910.11.27) 서거일

경술국치에 대한 항거로 단식 순국한 대한제국 문신

 


장태수 선생은 정부의 요직을 두루두루 맡았던 고위급 관리였습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인들에게 가싯거리 같았던 인물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뒤이어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선포됩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신체와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부모가 물려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고 믿어왔습니다.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인 <효경>에 나오는 실제 구절입니다.

따라서, 선생의 단발령에대한 저항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선생은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은거하기 시작합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일제는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할때 선생은 고종황제를 측근에서 모시기위해 다시 관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1905년 11월, 친일파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5명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우리는 이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이들의 이름은 우리 후손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은 을사 5적의 처단에대해 상소를 계속 올렸고 경술국치를 겪고 통곡하며 관직을 다시버리고 낙향하였습니다. 당시 일제는 이러한 충신들을 회유하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높은 직책의 자리와 돈을 주며 회유를 해왔는데 이들이 회유될시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거라는 치밀한 전략이였죠. 장태수 선생은 일제 헌병이 찾아와 제시한 돈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 나중에는 총과 칼을 들이밀며 돈을 받게 위협하였지만 끝까지 선생은 돈을 받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단식을 시작합니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不忠)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不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단식을 시작한지 24일, 1910년 선생은 11월 27일 순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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