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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의 비밀 2 - 상투를 지켜라

개화의 상징으로 강행한 '단발령'

단발령에 반대한 진짜 이유가 있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김홍집 친일내각은 양반유생이 정치권력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던 과거제도를 없애고 신식학교를 세운다. 양반유생들은 이 조치를 자신들의 정치, 사회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1985년 11월 15일 개화의 상징으로 강행한 단발령을 ‘단발=개화=일본화’로 여겼으며 조선을 오랑캐로 추락시키는 조치로 받아들였다. 이에 반발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고, 유림 안병찬은 자결하면서 자손들에게 유언했다.


“너희는 목이 잘릴지언정 상투 자른 사람은 되지 말라.” (유림 안병찬)


이때 1896년 1월 7일 궁내부 특진관인 김병시가 단발령 반대 상소문의 근거로 『효경』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를 들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단발령하면 떠오르는 구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단발령에 반대한 이유가 일본에 대한 저항이나 유교의 도덕론 때문이었을까? 우리 민족이 상투를 지키려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상투를 통해 한민족의 숭고한 정신과 문화를 찾아가보자.


■ 단발령이 바꾼 근대사

 

존마게 [丁髷(ちょんまげ)]         /        변발(辮髮)           /           상투

근대화과정에서 단발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겪어야 했던 공동적인 운명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명치)유신과 더불어 무사를 상징하는 ‘존마게’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으며, 중국에서도 청조를 배척하고 근대화하는 상징으로 청조의 상징인 ‘변발’을 잘랐다. 하지만 조선의 단발령은 ‘일제의 조선침략’이라는 변수가 숨어있었다. 그래서 단발은 한민족에게 역사의 상처로 남게 된다.


김홍집 친일내각이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제가 단발을 강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의복의 변화를 통해 일본제품(모자, 양복 등)을 수출하기 위함이었다. 을미사변과 더불어 백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단발령은 의병운동의 결정적인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고종은 이러한 정국의 혼란한 틈을 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새 내각은 그 동안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고, 이를 각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김으로서 단발령은 일단락된다.


그런데 그 뒤 광무개혁(光武改革) 때 단발령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1902년 8월에 군부와 경부청에 소속된 군인, 경찰, 관원 등 제한된 범위의 인물들에게 한하여 재차 강제 단발을 명하였다. 그 해 10월에 가서는 정부대신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명령이 하달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단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시행했을 정도로 근대화에 따른 역사의 대세였던 단발! 그런데도 유독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전통 머리모양이었던 상투에 집착하고 지키려했다. 왜 우리 민족은 상투를 지키려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일제의 강제단발이나 유교의 도덕론보다도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상투를 트는 의식이 행해졌던 관례와 혼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 관례와 혼례, 그리고 초례(醮禮)


가. 관례에 나타난 초례


관례 의식에서는 삼가(三加, 세 번 옷을 갈아입는 의식)가 끝난 후 초례를 행한다. 초례란 관례자에게 술을 내려 천지신명에게 어른으로서의 서약을 하게하고 음주 예절을 가르치는 의례이다(여자의 관례라고 할 수 있는 계례笄禮에서도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초례가 행해졌다. 하지만 계례는 후에 혼례로 흡수되고 만다).

관례에서 초(醮)란 천지신명에게 올리는 술을 말하며 이를 내초(乃醮)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은 관례자가 주례(賓)와 집사자(贊)에게 절을 하고 술을 마시는데, 먼저 주례가 관례자에게 읍(揖)하고 북향하여 축문을 읽는다. 이것을 초사(醮辭)라고 한다. 그리고 『의례儀禮』에서는 성인(成人)으로서의 삼가례 그 차체를 초(醮)라고 한다.


초사(醮辭) : 맛있는 술이 이미 맑아졌으니 좋은 안주와 향기로운 술을 절하고 받아 제사지내어 너의 상서로움을 안정시키고 하늘의 경사를 이어 오래 살며 잊지 말라. 旨酒旣淸 嘉薦令芳 拜受祭之 以定爾祥 承天之休 壽考不忘 (『주자가례』)
시가자始加者 언일가일초야言一加一醮也 (『의례』 권1)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성년례(成年禮)인 관례 자체가 모두 초례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세 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술과 안주를 달리하여 축사(祝辭)를 하는데 이는 경전한 제사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나. 혼례에 나타난 초례


관례와 마찬가지로 혼례도 초례가 중요한 의례였다. 전통혼례에서 신부집에서 행했던 친영(親迎)을 초례, 혹은 대례(大禮)라고 한다. 초례를 치루는 곳을 뜻하는 초례청(醮禮廳)과
초례청(醮禮廳)
 초례상(醮禮床)이라는 용어를 보면 결혼식 자체가 하나의 초례 행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술을 주고받는 의미도 알고 보면 천지신명에게 그들의 행복을 비는 종교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인생의 새 출발을 경건한 의례인 초례상 앞에서 술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가 술을 교환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천지신명에게 술잔을 올리고 인생의 첫출발을 축원하는 종교적 의례였던 것이다.


■ 초례의 제사 대상


그럼 초례의 신앙 대상은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해서는 중국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초례의 숭배와 경외의 대상은 천황天皇만이 인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별(태일, 오성, 열수)이다.
성신(星辰)의 아래에서 밤중에, 술과 포(脯)를 진설하고, 공물을 올려 천황(天皇)과 태일(太一)과 오성(五星)과 열수(列宿)에 차례로 제사하여, 상장의 의(儀)와 같이 글을 써서 아뢰는 것을 이름하여 초(醮)라고 한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
이는 초례가 별이 떠 있는 시각에 별을 향해 무언가를 기원하는 의식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초례의 종교적 대상은 보통 천지신명이라고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가. 오성(五星)과 열수(列宿)에 대한 제사


초례 혹은 초제(醮祭)란 밤하늘의 오성과 열수를 향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예식이다. 원래 성신에 대한 신앙은 민간신앙이었는데 후일 도교적 의례에 흡수되었다. 비교적 유명한 초례의 대상이 되는 성수는 태을[太乙(太一)]과 노인성(老人星)이다. 노인성은 본래 남극성(南極星)으로 노인성을 보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수성(壽星)이라고도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부모를 위하여 환갑을 축하하는 시에 매양 노인성을 많이 인용하여 축수(祝壽)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전교하기를 "태일(太一)에 초제(醮祭) 하는 청사(靑詞)에 이르기를, ‘동지 전에 가까운 갑자(甲子)’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직제학에 물어 보라." 하였는데, 김응기가 서계하기를 … “태일(太一)은 천신(天神) 중에서 높은 것이므로, 그 날에 초제(醮祭)를 지내는 것입니다.” 傳曰: "《太一醮靑詞》云: ‘冬至前近甲子’何也? 其問于直提學金應箕。 書啓曰: … "太一天神之尊者, 故以是日醮之" (『조선왕조실록』 <성종 22년>)
태을과 노인성은 인성(仁星)으로 태평을 이룰 수 있는 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역대왕조에서는 태을을 향해 빈번히 초례를 거행하였고, 민간에서는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로 노인성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 북두(北斗) 숭배

북두숭배는 성신숭배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두칠성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지 않

칠성원군

으며 단지 북극성을 회전할 뿐이다. 북두칠성은 28수의 중심으로 뭇별의 왕이 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북두칠성을 천신 가운데 가장 존귀한 천제(天帝: 상제上帝)의 거소로 인식했다. 따라서 북두칠성에 대한 숭배는 신화화되어 북두진군(北斗眞君) 혹은 북두성군(北斗星君)이라고 불리게 되고, ‘칠성님’으로 신격화되기도 했다.
북두칠성은 중앙에 거주하여 사방을 순유(巡遊)하고 세상의 생사와 축복을 관장한다. 그래서 북두칠성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공과와 선악을 관장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백가지 사악한 것을 없애고 흉한 기운을 없애는 염원으로 북두에 기원하고 예배했다. 팔난(八亂)을 극복하고 장생불노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향해 초례를 행했던 것이다.


다. 삼청(三淸)과 상제(上帝)

삼청전이 있었던 삼청공원(서울 종로구 삼청동 소재)

삼청은 옥청원시천존(玉淸 元始天尊)·상청영보천군(上淸 靈寶天君)·태청도덕천군(太淸 道德天君)을 말하는데, 이중에서 태청도덕천군은 노자가 신격화된 존재다. 도교에서는 이들을 삼청전(三淸殿)이나 삼청각(三淸閣) 혹은 삼청궁(三淸宮)에 봉안하여 종교적 의례의 대상으로 받들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국가에서 소격전과 삼청전을 세워 초례를 지내도록 했는데, 서울의 북쪽 삼청동에 삼청전이 있었고 그 안에 성제정(星祭井)과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
그리고 초제의 또 다른 숭배 대상으로 상제(上帝)가 있다. 상제는 우주의 최고신으로 우주를 주재하는 하나님의 본래 호칭이다. 상제의 거처를 자미궁(紫微宮)이라 하는데, 북경의 고궁 이름을 자금성(紫禁城)이라고 한 것은 지상에서 상제를 대행하는 황제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 초례의 기원 내용


그럼 초제를 지내면서 기원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가. 양재초복(讓災招福;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름)의 기원
초(醮)란 소재도액(消災度厄)의 법(法)으로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앙화와 액을 제거해 주도록 지고신(至高神)인 상제에게 탄원하는 내용이 그 핵심을 이룬다.


나. 국가적 기복


국가적인 행사의 축원문은 초례청사라고 하는데 청사(靑詞)란 초례 때 청등지(靑藤紙)라는 푸른 종이에 주자(朱字: 붉은 글씨)로 그 제사를 통해 축원하는 내용을 써서 오성열수나 삼청 혹은 상제에게 알린 후 태워 올렸기 때문이다. 국가의 초례에서는 기우(祈雨), 기양(祈𧟄), 기곡(祈穀) 등 농업생산과 관련된 기원이 주를 이뤘다.
얼음이 얼지 아니하고 또 안개가 끼인 이유로써, 좌승지 최이(崔迤)를 보내어 소격전(昭格殿)에서 태일성(太一星)을 초제(醮祭)하여 절후(節候)가 조화(調和)되기를 빌게 하였다. 以無氷且霧, 遣左承旨崔迤, 醮太一于昭格殿, 以祈時令調和.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


다. 개인적인 기복


민간의 관례나 혼례 때 행하는 초례는 수(壽), 복(福)의 기원이 대종을 이룬다. 국가적 차원이건 개인적 차원이건 민간에서의 복이란 부수강녕(富壽康寧) 등이고, 그러한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과 죽음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하늘에 기원했던 것이다. 요컨대, 초례의 기원내용은 양재초복(讓災招福)으로 압축할 수 있다.

 

[ 글 : STB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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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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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투는... 2017-07-18 23:07:03

    그래서 상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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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 민족은 상투를 지키려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일제의 강제단발이나 유교의 도덕론보다도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상투를 트는 의식이 행해졌던 관례와 혼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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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고 하였는데..
    그래서 왜 상투를 지키려 한거지요?
    기사에서는 왜 지키려한 것일까?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주질않네요.
    이래서 상투를 지키려 한 것이다.라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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