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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김승학 선생(1881.7.12~1964.12.17) 서거일

헤이그 특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07년 7월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되는 등 국망의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위기상황이 도래하자 선생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선생은 상경하여 종로 각 노상으로 다니면서 배일 강연을 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평리원 구치감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감한 뒤, 선생은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한말 선생의 국권회복운동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당시 최대의 국권회복운동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신민회에 가입했다.

이 시기 발생한 안중근 의거는 선생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직후부터 일제가 선생을 감시하고 탄압하였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일경이 선생이 봉직하던 학교에 와서 안중근과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괴롭힐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학부형들에게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고 이간질하면서 교육계에서 추방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생각된다.

임시정부의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으로 들어가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상하이로 가서 독립군이 쓸 무기를 구입하여 오는 일을 맡았으며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선생은 권총 등 모두 240정의 무기와 수 만 발의 탄약을 구입한 뒤, 같은 해 음력 8월 보름 다시 이륭양행의 기선을 타고 서간도로 귀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무기를 광복군사령부의 독립군 병사들에게 분배할 때, 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 그 편린이 무기수여식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선생의 연설에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 광복군사령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직속한 군단이며, 임시정부 군무부를 대표하여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 동포들의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한 경우를 무릅쓰고 다니면서 모집하였고, 4천리 되는 상해를 왕반(往返)하면서 수륙 양로로 가진 고난을 겪으면서 구입한 것이다. (중략)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가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1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이들 무기를 가지고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광복군사령부 휘하 독립군들이 거둔 성과 또한 컸다. 즉 광복군사령부 휘하의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부대는 3~4개월 동안 일본군과 78회 교전하면서, 56개소의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20개소의 면사무소와 영림창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였으며, 일본군경 95명을 사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기까지 5년간 옥고를 치뤘다. 광복 직후 1945년 9월 상순에 귀국한 선생은 그 동안의 숙원이던 독립운동사 편찬 작업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사 편찬회를 조직하여 신의주 노송정에 사무소를 두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정국의 정세는 선생을 거기에 매달려 있게 만들지 않았다. 옛 동지들인 오광선․ 전성호․ 김해강 등이 찾아와 정당 활동은 하지 말고 군사단체를 조직하자고 권유한 것이다. 선생은 이에 찬동하여 상경한 뒤 한국혁명군이라는 명칭 아래 동지를 모집하였는데, 그때 임정의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의 전갈이 왔다. 그것은 한국혁명군을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고치고 선생이 참모장의 임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뒤, 선생은 ‘광복군 국내 제2지대’ 설립 책임을 지고 개성으로 갔다. 여기서 해외에서 입국하는 청년 100여 명과 국내 청년을 모아 만월대에 임시 군영을 두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미군정의 지시로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후 상해에서 간행하였던 독립신문을 속간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정부 수립 직후 임정 기관지로 남한 단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광복 이후 선생이 가장 심혈을 쏟은 것은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선생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판시(主辦時) 백암 박은식 동지가 편저한 한국통사라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자고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다년간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포두에 우거(寓居)하시든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이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선생은 6․25 직후인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선생은 1964년 한국독립사를 탈고하였지만, 그것이 출간되기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사망하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선생의 한국독립사는 유고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제공 : 정상규의 독립가 어플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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