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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교수의 『남북한 단군영정 통일을 위한 제안 5』우리나라는 상고시대부터 남녀가 귀거리를 달았다

단군영정과 귀고리 문제
 
동북아시아 북방민족들은 신석시시대부터 ‘남-녀가 모두 귀를 뚫어서 귀고리’를 했었으며, 동호, 거란, 몽골, 만주족 등 청나라 시대까지도 지속적으로 남자가 귀고리를 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남성도 귀고리를 했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성의 귀고리가 전면적으로 금지된 것은 선조 5년(1572) 이후의 일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통일 시대의 단군영정에는 귀고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만주일대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남녀가 ‘결(玦)’과 ‘당璫)’이라는 형태의 귀고리를 했었다. ‘결’은 한쪽이 터져 있어서 귓불에 구멍을 뚫어서 돌려 끼우는 둥근 고리형태의 귀고리를 말한다.

재료로 구별하지 않을 때에는 모든 형태의 결(玦)을 결상이식(玦像耳飾)이라 부르며 재료에 따라 옥결, 금결, 동결, 마노결 등으로 부른다. ‘당’은 가운데가 오목한 장구 형태의 짧은 원형 통 귀고리로 많은 경우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당’도 귓불에 구멍을 뚫어서 끼우는 귀고리의 일종이다.

만주일대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의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시기부터 옥으로 만든 옥결(玉玦)을 신분이 높은 남녀 모두에 사용되었고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 시기에는 옥결(玉玦)과 더불어 옥당(玉璫)도 사용되었고 홍산문화 후기(BC 3500-3000)에는 이미 순동으로 만든 동결(銅玦)이 사용되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옥결뿐만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금결(金玦)도 사용되었다.

<자료 26>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BC 6200-5200)의 세계 최초의 옥결(玉玦) - 흥륭와문화 시기에는 지위가 높은 남녀는 모두 옥결을 착용했다.

 

<자료 27> 요하문명 지역 옥결(玉玦)과 옥당(玉璫)의 착용 모습 - 홍산문화 시기부터는 신분이 높은 남녀는 모두 옥결(좌)이나 옥당(우)을 착용했다.
        

 

 <자료 28>  홍산문화의 옥당(玉璫) 발굴 실례와 착용모습 복원도 (우실하, 2017) - 홍산문화 우하량유적 제2지점 1호총 25호묘, (여 35-40세)

 ‘제12회 홍산문화고봉논단’(2017.8. 13-15, 内蒙古, 呼和浩特市, 春雪四季酒店)에서 필자가 최초로 찾아내서 중국학계에 발표함
   
          

 <자료 29> 한 대(漢代)의 유리제 당(璫) 혹은 이당(耳璫)의 모습 - 전국시대에는 유리로 만든 이당이 발달하고 동한-서한 양한 시기에기 대유행한다.
       

<자료 30> 5300년 전 홍산문화 도소남신상(높이 55cm)과 귀고리 (2015. 7월 필자 사진) - 5300년 전 홍산문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워서 완성한 남신상,  남신상의 귓불에 귀고리를 했던 구멍이 발견되었다. 옥결인지 옥당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옥결을 했을 것으로 보고 복원도를 그렸다. 2012년 5월 오한기 흥륭구유적 제2지점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최초 발견되어 신화망, 인민일보, CCTV 등에 ‘5300년 전의 조상’, ‘중화조신(中華祖神)’, ‘홍산문화의 샤먼 혹은 왕’, ‘홍산문화 신상’ 등으로 소개.

  

  <자료 31> 북방민족들의 남성 귀고리 자료 (필자의 여러 박물관 답사 사진) - 동호족 왕의 귀고리(적봉박물관 2017.8.13. 필자)

 

거란족 남성의 귀고리(적봉박물관, 2017.8.13. 필자)

 

  3. 칭기스칸과 역대 몽골제국 황제들의 귀고리 - 적봉박물관 2층에 있는 징기스칸상

역대 몽골제국 황제와 귀고리

 

몽골 화폐의 칭기스칸

화폐 단위는 1, 5, 10, 20, 50, 1백, 5백, 1천, 5천, 1만, 2만 투그릭으로 5백-2만 투그릭은 모두 바탕색만 다르고, 귀고리를 단 칭기스칸 영정으로 되어있다.

 

<자료 32> 백제, 고구려, 신라의 사신의 모습과 남자 귀고리 -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의 당나라 염립본(廉立本:?~673)의 왕희도(王會圖) :  백제(좌), 고구려(중), 신라(우)

        
둘째.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성의 귀고리가 전면적으로 금지된 것은 선조 5년(1572) 이후의 일일 뿐이다. 우선 세종 1년(1419)과 세종 11년(1429)에 부분적인 금지가 이루어지고, 선조 5년(1572)에 남성의 귀고리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가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① 세종 1년 기해(1419년-영락 17) 1월6일(신해)
<진상하는 복용이나 기명 등을 제외하고 금과 은의 사용을 금하다> 교서를 내리기를 “금ㆍ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진상하는 물건도 오히려 계속하기 어려운데, 그로 만든 술잔이나 밥그릇을 상하가 통용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일이니, 금후로는, 진상에 따른 복용(服用)ㆍ기명(器皿)ㆍ궐내에서 쓰는 술잔 및 조정의 사신을 접대하는 기명ㆍ조관(朝官)의 관대ㆍ명부(命婦)의 뒤꽂이ㆍ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일절 사용을 금하며, 소금(銷金)이나 이금(泥金) 등속도 다 금하는데, 범하는 자는 법령을 어긴 죄로 다스리겠다.” 고 하였다.

② 세종 11년 기유(1429년-선덕 4) 2월5일(신사)
 <사헌부에서 건의한 금령의 조문을 요약하여 광화문 밖 등지에 내걸도록 건의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 금과 은은 본국의 소산이 아니므로 진상하는 의복과 기명(器皿), 또는 대궐 안의 술그릇, 중국의 사신에게 접대하는 기명과 조관(朝官)의 품대(品帶), 명부(命婦)의 수식(首飾), 사대부의 자제들의 귀고리[耳環], 기생의 수식(首飾) 이외의 기명과, 금ㆍ은을 녹여 부어 만들거나 도금하는 것을 금지할 것이며, ....”

③ 선조 5년 임신(1572년-융경 6) 9월28일(신해)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하다> 비망기(備忘記)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신체(身體)와 발부(髮膚)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嘲笑)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서울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위에 제시한 『조선왕조실록』은 많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선 세종 1년(1419)과 세종 11년(1429) 두 번에 걸쳐서 사대부 자손 이외에는 남녀 모두 금과 은으로 만든 귀고리의 착용이 금지된다. 이것은 역으로 (1) 이제까지 모든 남녀노소가 귀고리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2) 세종 11년 이후에도 일반인들은 금과 은을 제외한 것으로 사대부 자손들은 여전히 금과 은으로 만든 귀고리를 착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조 5년(1572)에는 (1) 신분에 상관없이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전통이 전면 금지되는데, (2) 여전히 여성들은 귀고리를 했을 수 있다.

셋째. 조선시대 문신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저술한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앞서 소개한 선조 5년(1572)에 남성의 귀고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것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우선 이 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선조(宣祖) 5년에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양반이나 평민 남녀는 반드시 귀를 뚫고 귀고리를 만들어 달아 중국 사람들에게 기롱을 당하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일체 통렬히 변혁하도록 하라.” 하니,
김주신(金柱臣)이 아뢰기를,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바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 남녀들이 귀를 뚫어 중국 사람들에게 기롱을 당하니 또한 부끄러워할 만한 일입니다. 이제부터 서울과 지방에 분명히 유시하여 오랑캐의 습속을 통렬히 변혁하도록 하셨으니, 훌륭하신 왕의 말씀이십니다. 진실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

오늘날에는 남자들이 귀고리를 다는 습속을 아는 사람이 드문데, 관서(關西)의 부녀자들은 아직까지도 귀를 뚫는 습속이 있다. 선묘(宣廟)의 기롱을 당하고 있다는 하교로 보건대, 중국 사람들은 모두 귀를 뚫지 않았다. 그러나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천자(天子)의 후궁이 된 사람은 귀밑머리를 깎거나 귀를 뚫거나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상고(上古) 때부터 이미 이러한 풍속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양반이나 평민 남녀는 반드시 귀를 뚫고 귀고리를 만들어 달았으며, 이유원이 책을 집필하던 고종 당시에는 이미 남자들이 귀고리를 다는 습속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관서(關西)의 부녀자들은 아직까지도 귀를 뚫는 습속이 있었으며, 이러한 풍속은 북방민족들의 것으로 중국인들은 귀를 뚫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상고시대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선조 5년 이전에는 남녀노소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았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에는 조선시대 선조 이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남성의 귀고리가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여름에 방영된 SBS드라마 ‘일지매(一支梅)’에서 신분이 다른 남성이 모두 귀고리를 했고 2005년에 상영된 ‘순수의 시대’라는 영화에서는 조선 초기 이성계, 이방원, 삼군부사 김민재 장군 등이 모두 귀고리를 단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동북아시아의 북방민족들은 신석시시대 이래로 남녀가 모두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았으며, 이런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선조 5년까지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통일시대 남북한의 통일된 단군영정에는 귀고리를 달아야한다고 본다. 이것이 한족들과 구별되는 우리의 전통이기도 한 것이다.

2008년 여름 SBS드라마 ‘일지매(一支梅)’에서 처음 남자 귀고리
조선 초기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을 그린 영화 ‘순수의 시대(2015)’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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