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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박사의 『유목민 이야기』 - 아틸라의 갈리아 대원정

아틸라가 동로마 제국 대신 이제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앞에서 말한 호노리아의 청혼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호노리아를 구하러 가려면 갈리아가 아니라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야 하는데 아틸라는 엉뚱하게 갈리아로 쳐들어간 것이다. 호노리아의 청혼은 서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의 한 구실이었을 따름이다.

또 하나의 설은 반달족 왕 가이세릭과 서고트족 왕 테오도릭의 개인적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가이세릭이 서고트 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아 처음에는 행복하게 잘 지냈는데 그만 아들 훈네릭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구실로 공주의 귀와 코를 자르고 친정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서고트왕의 복수를 두려워한 가이세릭이 아틸라를 매수하여 서고트족을 공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틸라가 갈리아 원정의 대의로 서로마 제국의 적이었던 서고트족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이 설은 약간은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설명은 모두 프리스쿠스의 단편에 적혀 있는 것인데 프리스쿠스는 또 하나의 이유도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프랑크족 문제이다. 당시 프랑크족의 왕이 죽자 두 아들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형은 아틸라를 끌어들였고 동생은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아에티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갈리아의 프랑크족 내부 문제로 인해 이제까지 우호적이었던 아틸라와 아에티우스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훈 제국과 로마 제국의 관계를 깊이 천착한 시드니 대학교의 김현진 교수에 의하면 갈리아 원정의 원인은 바로 이 프랑크족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김현진은 그의 연구에서 아틸라의 목표가 많은 역사가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틸라는 441년과 447년 동로마 제국 깊숙이 쳐들어가 군사적으로 압승을 거뒀는데도 불구하고 동로마 영토를 점령하지 않았다. 단지 다뉴브 이남의 무인지대만을 요구하였는데 이것도 다시 돌려줄 의향이 없지 않았다.

아틸라의 목적은 로마 제국을 훈 제국의 공납국으로 만드는 한편 다뉴브 이북과 라인강 동쪽의 훈 제국 영토 내에서 피지배 게르만 족들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것처럼 서로마 제국에 대한 명확한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였다. 프랑크족 문제는 그 기회를 제공하였다. 김현진이 보기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틸라의 갈리아 원정의 진짜 타깃은 서고트족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강력한 아에티우스 휘하의 로마군이었다.

아틸라가 동원한 군대는 훈족을 중심으로 여러 게르만 족들이 가담한 연합군이었다. 요르다네스에 의하면 그 수가 50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로는 엄청난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루기족, 게피다이족, 부르군드족, 스키리족, 투링기족, 프랑크족 등이 아틸라 군에 가담하였다. 물론 프랑크족은 아틸라 편에 선 프랑크족을 말하는 것으로 나머지 프랑크족은 서로마 편에 섰다.

아틸라 군의 진격로는 판노니아로부터 다뉴브 강 북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다시 라인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프랑크 족이 집중되어 살던 콜로뉴, 트리에르, 투르네 등을 향했다. 이는 갈리아 원정의 목적이 반아틸라 입장을 취하는 프랑크족에 대한 정벌에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봄에 판노니아를 출발한 아틸라 연합군은 갈리아 동북부를 거쳐 6월에는 갈리아의 심장부인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로마편에 선 알란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아틸라는 알란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아에티우스의 로마군과 테오도릭 왕 휘하의 서고트 군이 접근하였기 때문에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대한 포위공격을 중지하고 200km 정도 떨어진 동쪽의 트루아 근처로 퇴각하였다.

역사에서 흔히 ‘샬롱 전투’라고 일컬어지는 양측의 회전은 6월 20일 트루아 근처의 ‘카탈라우니아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 대해 제법 상세한 기록을 남긴 요르다네스는 피가 시내를 이룰 정도로 치열하게 싸움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양측의 사상자가 도합 16만 5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자신도 그대로 믿기를 주저한 과장된 수치였다. 요르다네스는 싸움이 로마와 서고트족의 승리로 끝났다고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로마편에서 싸웠던 서고트 왕 테오도릭이 전투 중에 죽었을 뿐 아니라 아에티우스조차 병사들과 떨어져 적군 가운데 헤매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또 아틸라 연합군이 먼저 퇴각한 것이 아니라 서고트족이 먼저 퇴각하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물론 아에티우스가 죽은 테오도릭의 아들 토리스무드에게 왕권 쟁탈전이 일어나 왕좌를 빼앗길 염려가 있으니 빨리 툴루즈로 돌아가라는 충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뜻 믿기 어려운 설명이다.

우리는 고트족 출신으로서 고트족 선조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차 있던 요르다네스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르다네스의 서술처럼 아틸라 연합군이 샬롱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 군사력이 파괴되었더라면 다음 해(452)에 있었던 아틸라의 이탈리아 원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군의 사령관 아에티우스도 퇴각하는 훈족을 추격하여 끝까지 싸우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로마군에 대한 위험이 너무 컸을 뿐 아니라 설령 아틸라 군을 무찌른다 해도 그렇게 되면 세력균형이 무너져 서로마 제국이 서고트족에 의해 압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샬롱 전투는 승패가 모호한 채로 끝났다. 그런데 김현진 교수의 지적대로 451년 갈리아 원정의 중요성은 샬롱 전투 자체에 있지 않았다. 원정의 진정한 목적이 훈족의 지배에 반대하는 프랑크족을 정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크족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프랑크족의 분열을 초래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 메로베의 사후 그의 아들들 간의 왕권 다툼도 한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 아들 중 한 사람이 킬데릭(Childeric c.440-481)이다. 흔히 프랑스의 초대 왕으로 일컬어지는 클로비스(Clovis, c. 466-511) 왕의 부친이다.

킬데릭은 아틸라의 도움으로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프랑크족의 초기 역사를 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왕이 된 후 킬데릭은 많은 여자들을 건드렸다. 이 때문에 프랑크인들의 분노를 사서 왕좌에서 쫓겨나 8년간이나 투링기아에서 도피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그가 도망갔던 투링기아는 동부 독일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에는 훈족의 지배하에 있던 곳이다. 킬데릭이 훈족의 지배권 하에 있던 투링기아에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아틸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게르만족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헝가리 역사가 보나(Bona)의 경우 그를 아틸라의 제후(vassal)로 규정한다. 보나는 킬데릭이 451년 샬롱 전투에서 아틸라 편에 참전하여 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69쪽)

이 킬데릭 왕의 무덤이 1653년 벨기에 국경근처의 도시 투르네(네덜란드어로는 도르닉)에서 발견되었다. 킬데릭 당시 투르네는 프랑크족의 수도였던 곳이다. 놀라운 것은 그 무덤에서 훈족 무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의 장식품들과 마구들이 대거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벌과 매미 모양의 브로치로 무려 300 개 이상이나 발견되었다. 이 브로치들은 킬데릭 왕이 입던 망토에 달려 있던 것으로 보인다. 브로치의 몸체는 금으로 되어 있고 양날개 부분은 금테두리 안에 석류석을 끼워 넣는 ‘클라와종’(cloison)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브로치는 다뉴브 지방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킬데릭이 훈족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을 드러내주는 유물이다. 또 그의 의복과 무기들도 동구의 훈 동맹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나는 그 일부는 아틸라가 준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70쪽)

김현진은 킬데릭이 훈족의 갈리아 원정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으며 아틸라 군이 퇴각한 후에도 그가 갈리아 북동부를 훈족의 대리인으로 지배했다고 본다. 즉 그는 아틸라가 임명한 갈리아 총독이나 마찬가지였다. 킬데릭이 지배하는 이 지역은 동쪽의 훈제국과 서쪽의 로마령 갈리아 사이의 완충지였던 것이다. 아틸라는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군사력의 일부를 남겨두고 판노니아로 퇴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 남은 병력의 지휘자가 바로 오도아케르였다.

그레고리우스 주교는 그의 역사책에서 작센인들을 이끌고 온 오도아케르가 킬데릭 왕과 동맹을 맺어 함께 알라만족을 무찔렀다는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프랑크족의 역사》 2권 18) 이 기록은 프랑크족의 킬데릭 왕이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던 것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도아케르의 부친 에데코는 아틸라의 최측근 인사였다.

간신히 이어져오던 서로마 제국의 명줄을 끊어버렸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이 오도아케르라는 인물은 이탈리아에 와서 왕 노릇을 하기 전까지는 그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어둠에 쌓여 있는 인물인 셈인데 그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 뿐 아니라 훈제국의 지배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큰 관심을 끄는 이 오도아케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참고서적】
Gregory of Tours, tr. by E. Brehaut, History of The Franks. 
Jordanes, tr. by C. Mierow, The Gothic History of Jordanes.
István Bóna, tr. du hongrois par Kataline Escher, Les Huns : Le grand empire barbare d’Europe IVe-Ve siècles (Errance, 2002)
Hyun Jin Kim, The Huns, Rome and the Birth of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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