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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서 의열단의 위상 -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김삼웅(현대사 연구가)
前 독립기념관 관장

 

김원봉은 6ㆍ25전쟁 후 평양에서 월북 또는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재북평화통일촉진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런 일들이 화근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김일성 유일체제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김원봉이 겪게 되는 운명이었을까?

 김일성정부는 1956년 8월 김두봉 ․ 최창익 등 북조선노동당의 옌안파 인물들을 반당 반혁명분자로 지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나 북한정권 수립에 대한 공로로 보아 동지들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었다. 이제 서서히 김원봉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원봉이 노동상에서 해임된 것은 1957년 9월이다. 그렇지만 조국통일민주주의 민족전선중앙위원회 상무위원과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 그리고 1958년 10월경까지 최고인민회의 2기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북한의 자료는 전하고 있다. 이 해 3월에는 북한정부에서 노력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북한의 공식문건 (신문포함)에서 김원봉의 이름은 사라졌다. 월북 또는 납북 인사들의 소식을 전하는 신경완의 증언에서도 1958년 9월 9일 조소앙의 사망 때에 조문을 갔다는 것을 끝으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김원봉이 숙청된 것은 1958년 12월~이듬해 1월에 걸쳐 30여 명의 저명한 남한출신들이 제거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적들과 직 ․ 간접으로 접촉하면서, 제국주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통일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중립화를 받아들이려 계획한 다수의 반혁명 종파분자들로 몰려서 숙청당한 듯하다.

그의 퇴장은 정치적 사형을 의미하며, 이는 통일전선의 상징적 존재였던 그가 권력의 소모품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김원봉의 ‘퇴장’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몇 가지 설이 제기된다.

첫째는 숙청설이다. 스칼로피노와 이정식은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숙청설을 제기한다.상임위원(최고인민회의-필자) 21명 중 4명 (김원봉 ․ 강양욱 ․ 성주식 ․ 이만규)은 군사정당의 대표자였는데 인민공화당의 김원봉과 성주식은 1958년 12월 ‘국제간첩’이란 죄목으로 숙청되었다. 조선민주당 대표인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척으로 영화를 누렸고 근로인민당 출신인 이만규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부류에서는 절반이 희생되었다.

두 번째는 은퇴설이다. 195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58년 3월 탄생 60주년을 맞이해서는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는 말이 있고, 김원봉 자신이 분파투쟁에 직접 관여한 형적은 별로 없어 일응 명예로운 퇴진의 모양은 갖추어졌을 것으로 불수도 있다. 단지 은퇴 후의 김원봉의 소식은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세 번째는 자살설이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옌변의 작가 김학철은 옥중에서 자결했다고 증언한다. “독립동지회장 김승곤 씨는 지난 9월 (1989년-필자) 한민족체육대회 때 중국동포선수단의 한 사람으로 옌변으로부터 잠시 고국에 돌아왔던 독립운동가 출신의 작가 김학철 씨로부터 들은 그의 최후를 전해준다. 약산은 그때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려 수감됐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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