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부터 10회 기획을 통해 국학박사이며 한배달부회장 그리고 한국땅이름학회명예회장을 맡고있는 훈민정음연구소 반재원 소장의 『홍사한은鴻史桓殷』을 통해 만나보는 칼럼, "반재원의 『단군을 만나다』 "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길시내의 중앙로를 국자가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국자가는 옛 하천평이며 왕검 단군이 태어나서 14세에 왕세자로 등극한 뜻 깊은 곳이다. 4300여 년 전에 왕자 즉, 국자國子인 왕검과 관련된 길 이름이 지금까지 ‘국자가’로 불리고 있다. 일제 때 발행된 ‘간도間島’라는 연변 유적도에 기록된 국자가國子街를 지금의 국자가局子街로 바꾼 이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보이지만 왕검 단군의 탄생지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중국인은 물론이려니와 연변에 사는 수많은 재중 동포들조차도 국자가 거리의 숨은 뜻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 가슴 미어지는 일이다.
연길의 현지인들에 따르면 백두산 동쪽이 해가 일찍 뜨는 상천평이고 백두산 밑 서쪽이 해가 늦게 뜨므로 하천평이라고 한다. 국자가가 있는 연길은 하천평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옛 지도에는 연길, 용정, 도문 일대를 모두 천평天坪이라고 하였다.
『홍사한은鴻史桓殷』에는 “왕검의 아버지 단웅 재위 48년에 천평산성을 쌓았다”고 하였고, “단웅 재위 68년에는 천평과 정평에 두 성을 쌓았고 재위 70년에는 천평에 외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성기전』 상편에는 “한웅이 천평에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만들고 청구에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였다.” 라고 했으며 『단기고사』에는 “천평의 위치가 길림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홍사한은』에는 “태자 검을 옹위하여 도문圖門을 만들고 축하 행사를 거행한 곳으로 그곳을 국자가國子街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연변의 국자가는 왕검 단군의 고향임에 틀림이 없다. 도문은 경축 행사 때 드나드는 개선문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기전 상편』에 “왕검이 성장하여 비서갑斐西岬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네 아들을 두었는데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하백을 모두 물의 신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지방 수령을 ‘방백方伯’이라 하고 도지사를 ‘도백道伯’이라 하듯이 하백河伯은 송화강 지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백伯은 ‘맏도비’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백녀’는 송화강의 한 지역을 관장하여 다스리는 도지사, 관찰사의 딸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단군도 하백의 딸과 혼인했다하고 해모수도 하백의 딸과 결혼 했다.’라고 한 내용을 보고 옛 학자 중에는 하백을 물의 신으로 알고 고사古史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듯이 글자의 뜻에만 매달려 번역하다 보니 하백녀가 물귀신의 딸이 되어 야담보다 더한 상고사가 되고 이러한 혼동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고사 전체가 전설의 고향으로 묶여버리고 말았다.
웅녀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웅녀란 ‘녀’ 즉 ‘신성한 여인’ ‘위대한 여인’이라는 것이지 곰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군역사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일반인도 알게 되었다. 웅녀가 곰녀가 되고 곰녀가 소설에도 등장하는 순박한 처녀 ‘곰례’가 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도 옹색한 변명이다. 『홍사한은』에는 왕검의 어머니 이름이 웅녀가 아니라 “열유列兪씨의 딸 교웅蟜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이 교웅을 웅녀로 둔갑시킨 것이다. 마치 일본이 삼국유사의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관성關城을 개성開城으로 변조한 소행과 같다. 또 『홍사한은』에는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으로 왕검의 부인이 비서갑 하백의 딸 ‘태원太源’이라는 이름까지 나와 있다. 이러한 기록은 『지씨홍사』나 『동국홍사』에는 없으며 『홍사한은』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또 『홍사한은』에는 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해모수의 딸 파소이며 아버지는 태백선주 박원달로 기록되어있다.
연변과 이웃해 있는 훈춘은 2천 년 전 동부여의 서울이었으며 그 뒤 천년 후에는 동북3성과 연해주를 아우르는 대국 발해의 동경성이 되었다. 훈춘은 신라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의 고향이다. 『홍사한은』에는 “해모수의 딸 파소가 훈춘에서 태백선주 박원달과 사귀다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자 몰래 배에 태워 보냈는데, 해류를 따라 영일만에 닿았고 양산에 이르자 산기가 있어 나정 숲을 지나다가 급히 아이를 낳았으니 이가 박혁거세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알에서 태어났다는 김수로왕도 그의 아버지가 “마한의 9세 영왕의 아들 이비아지이며 본명은 문文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여러 성인들의 불분명한 탄신일에 비하면 단군 왕검의 탄신일은 정확하다. ‘신묘년 음력 5월 2일 인시寅時에 탄생하였다’라고 『환단고기』에 명확히 태어난 시간까지 알려져 있는데도 이를 신화라고들 한다. 왕검의 등극시기인 38세 무진년(서기전 233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왕검이 태어난 단웅 재위 30년 신묘년을 역순으로 계산하면 역순으로 38번째가 서기전 2370년 신묘년이 된다. 따라서 왕검 단군의 생년월일은 신묘년인 서기전 2370년 5월 2일 인시임이 증명되는 셈이다.
따라서 왕검의 본적지는 지금의 중국 연길시이고 생년월일은 서기전 2370년인 단기원년 5월 2일 인시이며 아버지는 한웅이고 어머니는 교웅이며 부인은 태원이며 아들은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이다. 이로써 왕검의 호적등본이 밝혀졌다. 일본이 변조해 놓은 상고사를 바로잡는 일은 이처럼 얽힌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복잡하다. 그런데 우리는 광복 후 70년 동안 이 실타래를 풀기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지 반문해 봐야한다. 도리어 풀려고 하는 실타래를 뺏지는 않았는지.... 과연 우리에게 역사광복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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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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