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거를 폭격하리라,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은단공장 키 작은 어린 소녀
훨훨 하늘을 날고 싶은 꿈
스미스 아저씨 여의도 상공에서 곡예비행 하던 날
조그만 주먹 불끈 쥐고 꿈꾸었지
하늘을 날아야겠다
하늘을 날아야겠다
숭의여학교 시절
기숙사 사감 호시코 따돌리고
만세운동 부르다 쫓기던 몸
중국 땅 비행학교 들어가
대륙의 하늘을 날면서
암흑의 조선 땅 바라보며 가슴 태웠지
높은 창공 조종간 돌려
아시아 침략에 눈 벌겋던
일왕의 도쿄 황거 폭격코자
몇 번이나 다짐한 마음
장개석 휘하 혁명군 되어
일본군 상대로 싸우던 11년 세월
꿈에도 놓지 않던 조국 광복의 꿈
군복 벗고 비행기 내려와
백발 할머니 되었어도
카랑카랑하던 목소리
독수리같이 불타던 두 눈동자
큰 날개 접은 적 없는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
이는 ‘황거를 폭격하리라,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쓴 시다.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권기옥(權基玉,1901.1.11.~1988.4.19.)지사는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근래에 내가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고 사람들의 화제에 자주 오르는 것 같아요. 허나 내가 비행기를 탄 것은 무슨 최초가 되기 위한 사치스런 욕심에서가 아니었소.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편단심으로 내 청춘과 열정을 바친 것이오” 라며 말했다. 그렇다. 인간 권기옥에 대한 지금 우리들의 찬사가 ‘최초의 여류 비행사’에만 맞춰지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된 것도 결국은 조국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글쓴이는 권기옥 지사가 활약했던 광할한 중국 땅을 찾아다니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폐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었으며 그것은 삶 전부를 건 열정이자 희생이요, 헌신이었다. 나라사랑한다는 사람 많아도 적진에 비행기를 몰고 전진할 자 몇이나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권기옥은 18살 때인 1919년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독립만세운동과 만났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항일투쟁에는 무조건이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날며 왜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비행사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 환갑 나이이던 1961년 ‘여원’ 잡지 7월호에서 권기옥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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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경 중국 항저우 옹따오여학교 시절 |
3·1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에 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일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뒤 1920년 9월에 발동기 없는 목선을 타고 멸치잡이 배에 숨어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비행학교 시절 권기옥은 훈련비행 9시간 만에 단독비행이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권기옥을 비롯한 비행사들이 활동할 무대가 없었다. 1925년 5월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시정부에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테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된 권기옥은 1925년 가을 광동의 국민혁명정부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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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 중국인 여성비행사 이월화와 이탈리아 비행교관과 함께 |
1926년 봄 의열단의 배후 실력자인 손두환의 소개로 북경에 있는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군의 항공대에 들어간다. 그 뒤 중국 공군에서 소령, 중령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대위가 되었다.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이 1932년 상해전쟁을 일으키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 가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한다. 이 상해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로 권기옥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1935년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독려하려고 여류비행사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부탁하였고, 권기옥은 그 비행을 마치고 일본 폭격을 마음먹었으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의 대학생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계획 자체가 취소되는 아쉬운 상황을 맞는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했다. 이어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오자 권기옥은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여성 조직인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9년 귀국하였으며,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이 된 권기옥은 ‘공군의 어머니’로서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했다. 권기옥이 또 관심을 가진 것은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신념으로 1957년부터 1972년까지《한국연감》발행에 관여하여 196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일한 여성 출판인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내 자식이고, 극일(克日)하는 젊은이들을 키워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전 재산을 장학 사업에 기탁했다. 이와 관련된 1977년 2월 11일치 조선일보의 ‘남몰래 장학기금을 기부하는 할머니’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홀몸으로 어렵게 살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할머니(77살)가 남몰래 장학금을 지급해온 사실이 9일 밝혀졌다. 권 할머니는 지난 75년부터 1천만 원의 장학 기금을 마련하여 대학생 7명과 고교생 2명에게 매학기 마다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권 할머니가 장학사업에 뜻을 둔 것은 작고한 남편 이상정 장군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20여 년간을 중국 대륙에서 독립투쟁에 몸 바쳤던 이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조국에 유익한 일을 해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고 했다.
흑백 사진과 함께 소개된 기사에 수수한 머플러를 쓴 채 활짝 웃고 앉아 있는 권기옥 지사의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 이웃 할머니가 같다. 소박한 모습의 이 할머니가 저 광활한 중국 대륙의 창공을 거침없이 난 여자비행사 권기옥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권기옥 지사는 돈이 없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재산을 전부 내놓고 자신은 서울 장충동 2가 낡은 목조 건물 2층 마루방에서 1988년 88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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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옥 교수, 칼럼니스트 |
【약력】
문학박사. 『문학세계』시 부문 등단. 문학세계문인회. 세계문인협회 정회원. 지은 책으로는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다룬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7권), 한·중·일어로 된 시화집 『나는여성독립운동가다』, 영문판 시집 『41heroines, flowers of the morning calm』을 미국에서, 『FLOWERING LIBERATION –41 Women Devoted to Korean Independence』를 호주에서 펴냈다.
한편으로 우리말 속에 숨어 있는 일본말 찌꺼기를 다룬 『사쿠라 훈민정음』, 표준국어대사전을 비판하는 『오염된 국어사전』,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을 펴냈다.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한일 두 나라의 우호증진을 위한 밑거름 작업을 하고 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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