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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출병하지 않았다

“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삼국사기》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전쟁의 불씨가 된 이사건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590년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이 서거했다. 아들 영양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온건책을 펴며 한편으로는 피할수 없는 전쟁을 준비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597년 수문제는 오만방자한 국서를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귀의하지 않으면 멸망시키겠다는 위협이었다. 이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고수 1차 전쟁은 영양왕 9년이 되는 해인 598년 영양왕이 직접 말갈군 1만을 이끌고 요서의 영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선제공격을 받은 수문제가 분노하여 수개월후에 30만 대군을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듬해에 원(영양왕)이 말갈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의 작위를 삭탈하였다." - 《수서》 동이열전 고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㧾管 韋冲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丗績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9년(598)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니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문제가 듣고 대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에게 명하여 나란히 원수(元帥)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쳤다." 《삼국사기》

수나라의 역사를 다룬 수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를 받아적은 《삼국사기》에도 그대로 적혀 있다. 그런데 무언인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드라마 연개소문 속 영양왕

고구려 영양왕이 직접 지휘했을까?

<고구려 영양왕 `요서 출병`을 둘러싼 미스테리, 매일경제 2018년 8월 9일자>에서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고구려군 본대도 아닌 말갈병이 동원됐고, 병력도 겨우 1만명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군대를 영양왕이 지휘했다는 점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당시 동원된 말갈 군사 규모가 1만명이라는 점에서 이 출정이 본격적인 전쟁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음은 금방 알 수 있다. 더욱 고구려 본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왜 굳이 영양왕이 친정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영양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는 점이 무엇보다 더 큰 상징성을 갖는 군사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598년 영양왕의 요서 출병은 그 성격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영양왕의 친정이라는 고도의 상징성을 갖고 있음에도 국지전을 의도한 듯한 소규모 말갈병 동원, 그리고 이 출정은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의 서막이 되었다는 점 등 어딘가 어울리지 않은 고구려측의 출정 양상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생각해보시기를 권한다”고 여운을 남기고 있다. 

임기환 교수가 가진 의문을 다시 정리해보자. 굳이 왜 왕이 직접? 왕이 친위대도 아니고 말갈병을 거느렸다?  고작 1만명?  전쟁에 대한 상식이 있다면 의문이 들만하다. 왕이 출병한다는 것은 곧 바로 나라간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이 혹여라도 탈이라도 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진 전쟁도 이겼다고 기술하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보면 이 기록도 많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문을 한방에 풀 수 있는 문헌이 있다. 바로 <환단고기>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舊史 曰 嬰陽武元好太烈帝 弘武九年 帝遣 西部大人淵太祚 往討登州 擒殺 摠管韋沖 <구사>에 이르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 9년(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같은 사건인데 일국의 왕이 출병한 것이 아니라 장수였던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태조를 보낸 것이다. 게다가 상대  장수인 위충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나라 황제가 분노했다는 말과도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드라마 연개소문 속 연태조

상황을 다시한번 정리해보자.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총관 위충을 요서(遼西)에 몰래 파견해 고구려의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 지르고 노략질했다. 이에 홍무 9년(598)에 영양대제는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니 이에 산동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에 분노한 양견이 왕세적 등 30만 군사를 파견해 싸우려고 출병했으나 물난리,유행병 등과 고구려군의 저항에 의해서 패전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의 부친 연태조는 바로 1만명을 이끌고 가 총관 위충을 죽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본디 연남생)의 묘지명에 보면 연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묘지명을 보면 연남생의 할아버지 연태조 역시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쥐고 나라의 권세를 누렸다고 되어있다. 충분히 그 시기에 전쟁의 선봉에 나갈 용맹스런 장군이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중국이 왜곡해놓은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낸다.  역사학계에서조차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맞지 않어서 품었던 의문점들을 한 순간에 시원하게 풀어준다.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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