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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기억해야할 연해주 4월 참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왜 잔인할까? 사실 이 말은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Eliot)의 유명한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구절이다. 엘리엇은 몰랐겠지만 100년전 4월은 지독하게 잔인했다. 올해는 그 잔혹했던 연해주 4월 참변 100주년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4월 참변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현실이다.  
 
<4월 참변>은 1920년 4월 4일부터 2,3일에 걸친 일본군의 한인 살상극을 말한다.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이 볼셰비키 세력과 러시아 지역 한인의병들의 항일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연해주에 거주하던 신한촌을 습격해 가옥들을 불태우고 수백명의 한인을 검거, 학살을 잔행한 만행적 사건이다. 
 
일본군의 학살현장
삼일운동 이후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때 노인동맹 단원 강우규 의사(1855∼1920)가 수류탄을 투척했다. 간신히 사이토 마코토는 살았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화제가 되었던 이 의거를 행한 강우규의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톡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 사건을 비롯하여 일제에게는 당시 시베리아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너무나 거슬렸다.
 
1920년 1월 20일,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미군 철병을 선언했다. 1920년 3월, 일본 제국 사령부는 연해주의 혁명 수비대에게 전면 공세할 준비를 했다. 4월 1일 러시아 주둔 미군 사령관과 병사 2,300여명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일본군사령관은 4월 2일 블라디보스톡 정부에게 한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수용하여 4월 5일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붉은 군대는 경계 태세를 해제하고 4월 4일 지휘관들 다수가 주말 휴가에 들어갔다. 같은 날인 4월 4일 밤, 일본군은 붉은 군대를 습격하고 군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했다. 이런 일본군의 살육은 신한촌까지 뻗쳤다. 
 
한 러시아 측 문건에는 그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한인촌은 블라디보스톡 변두리에 있었는데 엄청난 강도와 폭력을 체험했다. 야만적인 일본군들은 한인들을 마을에서 쫓아가면서 소총으로 때렸다. 포로들은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고 반죽음의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톡은 끔직한 곳이 되었다. 포로들이 피투성인 채 찢어진 한복을 정리하지 못 하고 간신히 일본군을 따라갔다. 모든 지하실, 감옥들은 포로들로 꽉 찼다. 그날 살인범들이 몇 명의 한인을 죽였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선봉(先鋒) 신문 1926년 4월 4일일자는 현장을 이렇게 증언했다.
「1920년 4월 4일에 일본군벌은 소위 연합군이 시비리에서 철퇴함을 불구하고 오히려 강도적 행위로 해항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였다.……무고한 평민까지 학살·총화·강탈 등 잔포한 행동들은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 더욱 고려 사람에게는 이 틈을 타서 여지없이 박멸하려는 흉악으로 해항에서 수백 명을 체포하며 학교를 불지름으로 연추·수청·소왕영·하바롭쓰크에서 40여 명을 모다 일본 군벌의 총칼에 맞아 죽었다.」
 
이같은 만행은 신한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인 김이직, 최재형, 엄주필, 황경섭 같은 선생들한테까지 뻗쳤다. 최재형 선생은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들이 고통당할 것을 알기에 피하지 않아 집에서 일본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일본군의 습격은 4월 8일까지 계속 됐다.
 
4월 참변은 10월 간도학살까지 이어진다. 1920년은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승전도 알아야 하겠지만 연해주와 간도 대학살의 참극도 함께 기억해야한다. 독도, 위안부문제와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 등 한일간의 역사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4월 참변 추모비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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