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纛島)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일대에 있었던, 한강에 홍수가 날 때마다 지대가 낮아 물길이 생겼던 일시적인 섬이다 . 뚝섬은 경마장으로 유명했다. 20년 전 뚝섬경마장이 과천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부지 일부만 승마장으로 쓰이고 있다. 올해는 승마장이 '말 테마파크'로 조성된다고 하여 기대가 크다.
뚝섬은 왜 뚝섬이라고 명칭이 붙게 되었을까?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둑섬’, ‘둑도纛島’라 불렸다. '둑도', '뚝도', '독도'(纛島) 이후 '뚝섬'으로 발음이 바뀌었다
둑제纛祭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군신軍神 치우蚩尤에게 꾸준하게 지냈던 제사를 말한다. 일 년에 봄 경칩과 가을 상강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냈는데 무장武將들이 부임지로 떠가기 전에는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둑(纛)은 어떤 모양인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군영軍營을 대표하는 대장기로서 전쟁신으로 불리웠던 배달국 14대 환웅천황인 치우蚩尤를 상징한다고 전해지는 [둑纛]이라는 깃발을 만들었다. 이 둑纛에 대해서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운회(韻會)》에 "모우(旄牛)355) 의 꼬리로 이를 만들고, 왼쪽 비마(騑馬)의 머리에 싣는다."고 한다. 《광운(廣韻)》에"크기가 말[斗]만 하다."고 한다. 《이의실록(貳儀實錄)》에 "검은 비단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치우(蚩尤)의 머리와 비슷하며, 군대가 출발할 적에 둑에 제사지낸다." 고 한다. - 세종실록 133권, 오례 군례 서례 병기 둑·기·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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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왕 화성능행도 8폭병풍에 나오는 붉은 둑기.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
고려,조선 시대에 둑제를 지냈다.
고려시대에도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閱兵訖, 親祭纛于宮門 병사들의 사열을 마치고 친히 궁문에서 둑제[纛祭]를 지냈다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 13년(1287년)
왕이 일찍이 서경(西京)에 행차[巡御]하였을 때 커다란 둑기를 제작하여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인임에게 주어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 41 공민왕 18年 (1369년)
조선시대에도 [둑제]를 지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안군(永安君)에게 명하여 둑신(纛神) 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홍둑(紅纛)·흑둑(黑纛) 둘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므로 제사지내게 한 것이었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1393년0-
정도전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둑(纛)에 제사지내게 하니, 도전(道傳)과 제사에 참여한 장사(將士)들이 모두 철갑(鐵甲)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1월 27일 (1394년) -
예조에서 계하기를, "봄·가을의 둑제(纛祭) 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에 구분하여 정하지 않았으니, 적당하지 못하므로, 여러 제사 의식 중의 소사(小祀)의 예에 의하여 2일 동안 산재(散齋) 하고, 1일 동안 치재(致齋) 하고, 변두(籩豆)는 각각 여덟 그릇을 쓰며, 그 외의 드리는 제물(祭物)과 의주(儀注)는 그 전대로 할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19일 (1421년) -
둑제를 지낸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3번 치우천황께 둑제를 올렸다.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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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섬 유래비 |
서울 지하철 뚝섬유원지 역에서 내려 뚝섬 한강공원 광장으로 가면 <뚝섬유래비>가 있다. 뚝섬을 간다면 한번쯤 뚝섬의 역사와 유래를 찾아보자.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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