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위키피디아 |
기원전 99년 한(漢)나라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흉노와 전쟁을 치르던 장군 이릉(李陵)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릉은 열배가 넘는 수의 흉노군과 싸우다 포위당하자 남아 있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투항을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격노했습니다. 급기야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식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신하들은 무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릉을 비난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들과 달리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무제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사마천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명했습니다.
사마천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냥 사형을 당하든가, 50만전을 내고 감형을 받든가, 궁형을 당하든가 이 중 선택해야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결국 사형 대신 궁형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남성으로서 사형보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해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그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는 《사기》에서 무제를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역사가는 객관성과 중립을 지켜 기술해야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격노했습니다. 급기야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식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신하들은 무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릉을 비난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들과 달리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무제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사마천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을 명했습니다.
사마천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냥 사형을 당하든가, 50만전을 내고 감형을 받든가, 궁형을 당하든가 이 중 선택해야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결국 사형 대신 궁형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남성으로서 사형보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해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그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는 《사기》에서 무제를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역사가는 객관성과 중립을 지켜 기술해야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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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흉노·고조선·대원국 등을 정벌해 한나라 강역을 크게 확장시킨 중흥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무제를 아주 박하게 기술했습니다. 사마천은 “무제는 즉위 초에 더욱 공경하게 귀신의 제사를 받들었다.”라고 무제를 영생불사를 꿈꾸는 방사(方士) 군주처럼 그렸습니다.
무제의 가장 큰 우선정책이 ‘해중(海中)의 신선’을 찾는 것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한고조도 크게 곤욕을 겪었던 흉노를 정벌했으나 정작 〈효무본기〉에는 이에 대한 사항이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조선 정벌에 대해 “이듬해 조선을 정벌했다”라고 한마디로 묘사하고, 대원국(大宛國) 정벌에 대해서도, “이해에 서쪽 대원국을 정벌했다”라고 한 마디로 정리했으며, 나아가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헤아려보니 문이 1천 개이고 방이 1만 개였다”라고, 진시황 못지않게 거대한 역사(役使)를 좋아하는 군주로 묘사했습니다.
무제에 대한 이런 박한 기술은 그가 당한 궁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마천은 황제로 시작해 삼대와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이어지는 하화족의 민족사를 서술하려는 자신에게 궁형을 가한 무제를 좋게 평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사가가 아무리 중립성을 강조해도 역사 서술에 절대적 객관이나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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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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