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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동학농민혁명, 그 수십만의 희생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조상의 죽음을 되새겨야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원래 5월 11일은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승리한 전승일로 이날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작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기념식 설명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학농민군의 저항은 항일의병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의 영향으로 항일의병 활동들이 분연히 일어났고 이것이 1919년  삼일운동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졌으니 대한민국의 탄생도 역시 동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혁명(1894) → 청일전쟁(1894) → 러일전쟁(1904)→1차 대전(1914~1918) → 삼일운동(1919) →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동학혁명은 결과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청일전쟁이 붙었고 일본이 승리했다.  청일전쟁이후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했다. 10년뒤의 러일전쟁을 낳았다. 러일전쟁은 0차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고 이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외교단을 파리에 파견하고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기획되어서  삼일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여러달 동안 벌어지게 되었다. 삼일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졌다. 동학혁명은 이런 큰 파장을 일으키는 동인이 된 것이다.

동학혁명을 다룬 SBS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학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보지 못한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자리잡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정부에서는 청나라에 군병을 청했고 청나라가 진입하자 천진조약(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군도 함께 한반도에 상륙하게 되었다. 동학군과 조선 정부는 전주화약을 맺고 서둘러 1차봉기를 매듭짓게 되었다. 하지만 조약을 맺으면 청군과 일본군이 물러가리란 기대와는 달리 일본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

SBS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

이 참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점령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를 하였고 이때 더 큰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다.
 
히로시마는 동학군 토벌 및 일본의 조선 침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동학군 토벌의 모든 명령이 이곳에서 내려졌다. 메이지 일왕은 1894년 9월 15일부터 전쟁이 끝나는 이듬해 4월 27일까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일본군의 민중학살 첫번째 명령을 내린다. 동학농민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이다.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열함을 요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하라" (1894.10.27)

몇가지 기록을 보면 

"보이는 대로 총살하고 있다. 우리 일본군 한 사람이 이 삼백명의 적을 상대한다" - 도쿠시마니치니치시문(1895년 1월 9일)

상등병 쿠스노키 비요키치는 '메이지 27년 종군일지'에서 1894년 7월 23일부터 1895년 2월까지 전국을 돌며 매일 12명 이상 동학 농민군을 참살했다고 적었다.또 "버려진 시신이 680구나 되고 산처럼 쌓여있다"고 진술했다. (YTN 2013-08-29)

얼마나 많은 동학 농민군이 죽었기에 학살이라고 까지 하는 것일까?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망자가 30여만 명이나 되었으니 미증유한 유혈의 참상” - 박은식 ‘조선독립운동지혈사 -
​30만명~ 60만명이 되는 동학도들이 희생을 당했다.

 '동학 연구'하는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는 “ 이토 히로부미 총리 등 수뇌부 지시에 따라 계획적으로 자행한 첫 제노사이드(대량학살) ”라고 했다.

일본의 이노우에 가츠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는 “사료를 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부상자를 포함해 30만∼40만 명에 이르며, 그 중 일본군에 학살 당한 농민군 숫자는 5만명 이상된다”고 주장했다.

동학혁명의 결과로  1결(結) 80냥 하는 세금을 30냥으로 감하게 되었다.

“결세(結稅) 및 호세(戶稅)를 개정하여 돈으로 대신해 ‘꿰미 돈’으로 징수하였다. 매년 1결당 징수한 꿰미 돈은 30냥, 1호당 징수한 꿰미 돈은 3냥으로, 그 외에 징수하던 금액은 일체 엄금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오히려 구습에 젖어 신법을 준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새로 개정된 신법이 반포되자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여…희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황현,매천야록)

그러나 이는 동학농민군 약 30만명의 값비싼 죽음이 있었다. 학살이 있었다. 
이 학살이후에 일제가 해방이후까지 한국인을 학살당하고 희생당한 숫자가 약 800만명이다.

1875년 느닷없이 강화도와 영종도에 나타나 이른바 ‘수교’를 요구하며 시작한 학살과 침탈은 1945년 패망 때가지 70년 동안에 걸쳐 끊이지 않고 자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은 어림잡아 8백만 명에 이른다 (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13쪽)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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