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or1918년)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관전현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 비용(단학회보)은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 선생이 보조했고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교당과 전토를 사서 기증한 것은 특기할 일이다 (대배달민족사 5권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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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환단고기 북콘서트 |
'배달의숙'에서 오동진,계연수, 최시흥 등이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
배달은 배달국,배달족,배달의 민족에서 온 이름이다. 의숙은 공익을 위하여 의연금을 모아 세운 교육 기관을 말한다. 서전의숙(瑞甸義塾), 화성의숙(樺成義塾), 동명의숙(東明義塾) 등이 있고 배달의숙이 있다.
일단 당대에 '배달'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아보자.
오운현 배달촌
혈성단장 김국초는 1920년 11월 28일 소재지를 ‘오운현 배달툰(倍達屯)’이라 명기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마을의 오늘날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배달촌은 1921년 1월 마적 떼의 습격을 받은 뒤 오운(烏雲)현으로 옮겨 다시 건설됐다. ‘배달촌’이라고 명명된 건 이즈음… (동아일보 2019.01.24.).

출처 : 동아일보 2019-01-24
삼원보 배달촌,새배달
삼원보에도 배달촌이 있었다. 1910년대 서간도에서 설립된 자치기관 경학사와 부민단은 3·1 운동 이후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었다. 『한족신보』는 1920년 1월 15일 중국관헌의 탄압으로 신문사는 강제폐쇄되었다 이후 한족회는 신문이름을 『새배달』로 고쳐 발행했다. 신문 발행장소는 삼원보 배달촌이었다.

<오운현 배달촌>은 2019년에야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알려졌으며 <삼원보 배달촌>은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배달은 한인촌명,동네명 등으로 쓰였다. 배달의숙이라는 민족 교육학교가 50여년 전부터 있었다고 알려왔으나 아직 인정을 못받고 있는 실정이다.
(길림성)통화현 배달학교

1920년 11월 3일 중국 길림성 통화현 반라배촌에 배달학교가 있었다. 이 배달학교에 일본군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만주 주둔 일본군이 조선인 박멸을 목표로 펼친 경신대토벌 작전을 벌인것이다. 배달학교는 이시영,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지원으로 문을 연 민족 교육의 본산이었다.

박달학원(博達學院)
박달학원은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 안에 설립되었던 교육기관이다. 박달(博達)이 ‘밝달’이고 곧 ‘배달’이다 박달학원은 배달학원과 같은 호칭이다. 신규식(申圭植) 선생이 독립운동할 청년들을 중국 및 구미 각급학교에 유학시키기 위한 유학예비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 조계 안에 설립하였다. 강사는 박은식·신채호·홍명희·문일평·조소앙 등으로 쟁쟁한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가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오동진,이상룡 선생이 자금을 댄 <배달의숙>은 있었다. 배달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동네명 등으로 쓰였고 배달학교,박달학원 등이 쓰인 것을 보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 명칭은 당연히 당대에 쓰일 수 있는 명칭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밝혀지지 않은 교육기관이나 한인촌 등도 많으므로 ‘배달의숙’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달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지원으로 문을 연 학교였다면 오동진,이상룡 선생이 지원을 했다는 <배달의숙> 또한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올바르고 합리적인 해석이고 추정이라고 본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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