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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 선생이 밝힌 광개토태왕비문의 진실, 이젠 알아야

계연수 선생의 업적 중의 하나가 광개토태왕비문의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가 고의로 훼손한 글자 138자의 결자를 복원하여 비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출처 : 세계환단학회

그 과정을 보자. 

1898년(戊戌)에 계연수가 고구려 고도(古都)에 갈 때 오동진이 듣고 50금을 주고, 이홍린이 포를 내어 도왔다집안현에 가니 이덕수와 김효운, 백선건이 이미 비석에 와있었다. 1912년에 이 내용을 선천의 계연수와 철성의 이관집이 함께 기록했다. - 李裕岦, 1973 廣開土聖陵碑文譯註, 大東文化社, 30~31쪽 -

1898년 무술년에 처음 광개토태왕비문을 답사했었고 14년 후에 가보니 비문(碑文)의 제2면 10행과 제3면 1행을 보았을 때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결락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열도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정복당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일본인 누군가가 고의로 비문(碑文)을 훼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계연수 선생은 비문의 원래 내용을 그대로 남긴 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를 남기게 된다. 

광개토태왕비 탁본 [쌍구가묵본] 가장 훼손이 심한 2면 10행과 3면 1행이다. 

1898년 답사시에 '이홍린'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홍린은 조선총독부 관보에 한차례 기록되어있으며 삭주군지에 발문을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은 이유립 선생의 주장의 신빙성을 더해주는 사실들이다.  

삭주군 이홍린 (朔州郡 李鴻麟)

조선총독부 관보 제1510호 (발행일 大正6年(1917년) 8月 15日) ,제목 :  登錄名義人表示變更

삭주군지에는 이홍린의 발문이 있다. (조선환여승람)

조선환여승람은 1936년 이병연(李秉延)이 편집하고, 안병태(安秉台)가 교열 발행한 전국 각 군의 읍지 가운데 부안, 남원, 진안, 고창의 읍지. 1922~1937년 공주의 보문사(普文社)에서 간행하였는데 129개 군 가운데 26개 군의 내용만 발간, 보급되고, 나머지 103개 군의 것은 일제의 감시와 재정난으로 미결책(未結冊) 상태로 보관되어 왔던 것을 198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장책해 소장하고 있다. ....장위산인 윤용구(尹用求)와 규장각 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이 있고 전임 내장원경(內藏院卿) 김윤환(金閏煥)과 이병연의 발문이 있다. 경상도 함안군지 뒤에 안정려(安鼎呂),  ....평안도 삭주군지 뒤에 이홍린(李鴻麟), 함경도 함주군지 뒤에 김주성(金主聲)의 발문이 별도로 실려 있다.

계연수의 광개토성릉비문징실을 밝힌 이유립 선생

계연수 선생의 광개토태왕 비문 답사 그리고 비문 내용을 세상에 밝힌 것은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은 1931년 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 삼육사의 잡지 삼육에 이를 기재했다. 이유립은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回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하여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삼육사의 실재성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지금은 신문의 옛 기록을 검색할 수 있지만 이유립 선생 당대에는 컴퓨터는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것조차 알 수 없는 시절이다. 이는 삼육사 단체 조직에 대한 이유립 선생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이유립 선생의 일제시대 전반에 관한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삼육사 조직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


평안북도 삭주군 구곡면 신풍동에서는 청년기관이 업슴을 유감으로 하야 이유립, 김석순, 명재수, 최현필, 김상영 등 몇 사람이 상의한 결과 "지덕체 삼육三育을 본지로 하야 청년의 인격을 높이고 실력을 양성하며 그 향상 진보를 기한다"는 목적 하에, 작년 11월 15일에 "삼육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얏는데 사원은 십여명에 불과합니다마는 의지만은 일관하여 사칙을 준수하여 매일 일요일을 찬서일로 하야 세간학 입신책 지방의 정형, 각국의 국정, 세계의 대세, 조선의 특수사정 등을 호상문답 또는 설명, 기타 명문 낭독을 하며 월요일을 저축일로 정하야 1전 이상의 심성저금을 하얏다가 금1원이 되면 곳 삭주 금융조합에 공저共貯하기로 하며 토요일을 반성일로 하여 일상의 결점을 호상경계하며 장처를 발양하야써 삼육전재의 도에 전력합니다. 그러고 매월 1회씩 회람잡지를 발간하는데 그 잡지의 내용은 청년수양, 의사통일, 정신작흥, 실력양성, 문예보급 및 취미제공, 고전연구, 물리응용, 독서장려, 저금장려, 농촌계발, 생활안정 등을 목표로 각각 스스로 의견을 정하게 하야 매월 제1 일요일 발행으로 하여 지방의 청년문사의 명문옥고를 다수 모집하야 취사편찬한 다음에 구령포 경찰관 주재소의 허락을 득하야 순서 차례로 회독回讀하며 이밖에 도서를 공동구입하야 일일윤독하는데 신문은 동아일보, 잡지는 인도人道, 동광東光, 신생新生, 대중지광大衆之光, 삼천리, 백두산, 중성衆聲, 별건곤別乾坤, 조선소년 별나라, 농촌청년, 농민, 강의록은 조도전(와세다)중학 강의록, 대일본사회대학 강의록, 기타 천문지리, 이과, 역사, 철학, 사상수양어학, 수학, 법률, 문예사전 등 여러가지이니 이것도 순서로 회독합니다. (삼육사 동인 일동) -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 -

삼육사 조직이 동아일보 그대로 사실임이 드러났으니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을 게재하여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된다. 결국 해방후에 다시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알린 광개토왕비문징실(廣開土王碑文徵實)의 사료가치와 연구가치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된다.

1973년본 광개토왕비문징실(廣開土王碑文徵實)

불행하게도 계연수가 이유립에게 주었다는 비문징실 원본이나 삼육7월호에 실린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지금 현존하는 것은 이유립 선생의  "廣開土王聖陵碑文譯註"(서울 대동문화사 1973년판)[중앙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소장]와 "韓國學"(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제1집(1973년)에 실려 있는 "廣開土王碑文徵實" 뿐이다.  

여기에는 계연수와 이관집이 1898년 5월과 1912년 5월 2번에 걸쳐 비를 찾아가는 동안에 있었던 일,비에 참배하고 비문을 베끼는 과정,글자의 징실에서 자획에 대한 인상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비의 구조, 크기, 자수, 암석의 질, 비의 형태, 비각의 유무 등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비문의 비밀을 밝힌 내용은 이미 세상에 알려졌어야 할 기록이다. 

이 비문징실의 내용에 관해서는 세계환단학회에서 윤창렬 교수가 발표한 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광개토태왕비는 환단고기를 증명한다ㅣ광개토대왕비문과 환단고기의 적합성ㅣ대전대학교 윤창렬 교수ㅣ2018 공동춘계학술대회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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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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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형섭 2020-07-02 14:46:28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일식분식도에 의한 삼국의 도성위치와 말씀하시는 삼국의 위치가 다르듯 한데요 의견을 올려 주세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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