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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학회 자강도 지역 분회 활동를 분석해보니...

단학회의 조직도를 보면 회장을 위시하여 명예회장,고문,교화사,간사 등을 두었으며 지역별로 분회를 두었다. 분회에도 회장과 총무가 있으며 간사와 교화사까지 둔 곳도 여럿 보인다.  

출처 : 위키백과

자강도(慈江道)는 북한의 북부 압록강 중류에 있는 도이다. 자강도청 소재지는 강계시이다. 서쪽으로는 평안북도, 남쪽으로는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동쪽으로는 량강도와 접한다. 도의 이름은 자성군과 강계시에서 앞 글자를 따온 것이다1949년에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신설된 도(道)로, 13도제 시기의 평안북도 동부와 평안남도 일부를 포함하였다. 그 후 낭림군과 중강군을 흡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3도 편제일 때의 평안북도 그속에 지금의 자강도에 속하는 강계군,자성군,희천군이 있다.

실제로 단학회의 지역 조직도를 보면 자강도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고 평안북도 전체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해방전 단학회 시절의 조직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편의상 자강도 지역의 분회를 알아보는 것임을 밝혀둔다.

자강도 지역 분회 간부 명단

1) 희천분회장 : 나창헌, 총무 양찬구 
2) 강계분회장 : 이항봉(1대),강만년(2대), 총무 김낙주
3) 자성분회장 : 궁인성

1) 단학회 희천 분회

분회장 나창헌 

먼저 나창헌을 보자. 나창헌(羅昌憲, 1896년 ~1936년 )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다.  평안북도 희천군 진면 행천동(현 희천시) 출생으로 1919년 3·1 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었는데,  3.1운동은 24살 청년 나창헌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학생 대표로 참여한 나창헌은 이후 안재홍의 청년외교단에 가입하였고, 의친왕 망명을 꾀한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했다 출옥 후에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서 일했다. 한국노병회는 김구와 여운형이 조직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투신하여 경무국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으로 근무했다. 임시정부 인근에 세웅병원을 개업해 의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1925년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안하는 등, 위험한 상하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면서 외교 우선 노선을 펼치는 이승만 계열의 반대파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상해 내에서 밀정 제거와 일제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무장저항운동단체인 병인의용대를 구성했다. 당시 상해에서는 일본이 조선인을 밀정으로 고용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일이 잦았다. 이 단체에는 나창헌의 형제들도 가담했다병인의용대는 4월 8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본을 놀라게 했으며, 나창헌은 9월 5일 직접 다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지는 제2차 폭탄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출처 :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 다큐

그는 일본 경찰의 끈질긴 추격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지 않고 있다가, 중국 사천성에서 만현의원을 운영 중이던 1936년에 4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1993년, 마침내 나창헌의 유골이 수습되어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희천분회 총무 양찬구

희천군수(煕川郡守) 주철용朱哲濬氏와 동군주사(同郡主事) 양찬구(梁燦龜)씨 人民에게 전곡(錢糓)을 勒排 일이 탄로됨에 該觀察使가 운산군수(雲山郡守) 양봉제(粱鳳濟)씨로 사관(査官)을 정야 행사(行査)케얏다더라 - "定査査貪", 대한매일신보(국한문)[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71120,

1907년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 양찬구는 희천 주사(主事)였으며 실존인물임을 알 수 있다. 

군직원(郡職員) 명단 (증거품:2년도 제12호) 중에 양찬구 선생이 임시정부 평북 희천 군감으로 기록되어있다. 

2) 단학회 강계 분회

단학회 분회 조직도 중에서 1대와 2대까지 있는 것은 강계분회가 유일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1대와 2대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강만년의 사망이다. 강만년 지사는 1919년에 사망했고 이항봉 지사는 1922년 사망했다. 순서대로 본다면 강만년 선생이 1대가 된다. 물론 사망과 상관없는 순서일 수도 있다. 

①이항봉(李恒鳳) 강계 분회장
평북 강계(江界) 사람으로 1920년 10월 30일 서로군정서의 부관(副官)으로서 이창덕(李昌德)·송문하(宋文河)·이경삼(李京三)·이춘식(李春植)·전병기(田丙基) 등과 함께 국내에 파견되어 암살단원 이창덕(李昌德)을 밀고한 김성진(金成振)을 사살하였다.
1922년 7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강계군 종남면(從南面) 허군옥(許君沃)의 안내로 전면장 김경룡(前面長 金慶龍)의 집에 찾아가서 군자금 5천원을 출연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허군옥의 밀고로 출동한 강계(江界)경찰서 수사대와 교전하다. 송문하와 함께 순국하였다. 그후 서로군정서에서는 별도의 결사대를 파견하여 밀정 허군옥을 사살하였다. 한다. 이항봉(李恒鳳)은 1922년 7월에 강계 경찰서 수사대와 교전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②강만년(姜萬年) 강계 분회장 ~ 1919-08-31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강만년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독립군의 양성 또한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무력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강만년이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1919년 8월 31일 평북 위원(渭原), 강계 대안(對岸)인 집안현(輯安縣) 주재 일경 40여 명이 중국군병 20여 명을 동원하여 양군(兩郡) 인접의 집안현 온화보(蘊和堡)에 사는 농민과 산포수(山砲手) 400명을 포위 수색하였다. 그리고 민가 13호(戶)를 전소시키고, 수백 명을 난타하였으며, 독립단총지단(獨立團總支團) 총무 박문용(朴文瑢), 임원 한병기(韓炳基), 독립운동가 박운석(朴云錫), 70세 노인 4명 등을 강변 나무숲에서 사살하였다. 이 때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하던 강만년도 최경화(崔敬和)·장형도(張亨道)·임봉익(林奉益) 등과 함께 독립군에 연락한 혐의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③총무 김낙주

평안북도 강계(平安北道 江界)와 渭原의 兩郡에서 일본관헌(日本官憲)에 검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원(大韓民國臨時政府員)은 다음과 같다.
金洛冑田園燦金以文金文植金大建 등 448名 (朝鮮民族運動年鑑 1920년 08월 21일 )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단학회 자성분회

궁인성 단학회 자성 분회장

1874년 출생한 공인성 선생은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청송리 출신으로 유인석의 문인으로, 일찍이 스승의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원(大韓獨立團員)으로 활동하였고, 소모장(召募長)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평안남도 지역에서 광한단(光韓團)과 관련을 맺고 광한단 지단 설립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1년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2011년 궁인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가 체포되었을때인 1921년 04월 13일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실린 기사를 보자

 

"피고 궁인성은 구한국 시대에 의병대장으로 유성에 고명한 류인석의 수제자로 배일사상이 풍부하여 일한합병이래로 더욱이 시기를 기다려 활동하리라 하던 명망이 있던 유생으로 대정 8년 3월 1일 조선독립 선언만세 소요 이후로 사상을 일층단결하에 동년 음력 11월 중순에 쾌연이 고향을 하직하고 류인석의 계통되는 박장호 ,조장선 등이 조직한 지나 관전현 향로구에 있는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기로 출발하여 동디에 이르러 류인석의 고데로 겸하여 자기의 사상이 되는 동단 부총재 백삼규와 동 간부 윤창수, 양계하, 전덕원과 모여 서로 굿이 맹셔하고 동인으로 부터 평안남도 중에 자산,성천,강동 평양강서 삼화 룡강평원 등 각군에 지단을 설치하고 또 군자금을 모집하여 오라고 하는 명령을 받아...."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렇게 단학회 분회를 알아보기 위해 그중에서 자강도 지역의 분회 간부 명단을 분석하고 추적해보았다. 결론은 여기에 거론된 6명은 모두 실존인물이며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한 인물이며 9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그 공훈을 인정받은 분들이 대부분이다지역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때에 <단학회 분회 명단>은 모두 신뢰할만하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단학회의 역사로써 독립운동사의 하나로써 연구하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이자 사명이라고 할 것이다.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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