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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뿌리깊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1. 고구려왜 아직도 고구려는 태조왕,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인가?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이후 ,백제에서는 3세기 고이왕이후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에서는 4세기 내물왕부터.. (금성교과서 중학교판,2020년)

출처 : 금성교과서 중학교판(2020년) 

2020년이 되었는데도 역시 태고내다. 태조왕,고이왕,내물왕만 계속해서 배우게 된다.  

"....이것을 무너뜨린 다는 것,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것보다도 쉽지 않은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죠. 한 패러다임이 다음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쓰다소키치,이병도 선생이 만든 틀속에 안주하면 모든게 편합니다.  (이종욱 교수)

태고내 즉 고구려는 태조왕 ,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부터라는 이 논리를 깨는 것은 지동설보다 어렵다는 얘기다. 바꾸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해방이후 초기 교과서로 들어가보자.

"태조왕 (3~121) 때부터 고대 국가의 체제를 이루고..." (국사 교과서 일조각 출판 ,문교부 검정 1969년 이병도 저 20쪽)

고구려는 태조왕때부터다. 태조왕때 고대국가의 체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고대국가의 성립]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국사 국정교과서 7차 교육과정 2007년판 47쪽)  

6대 태조왕 이전에는 1대 추모왕(주몽)에서 유리왕,대무신왕,민중왕 그리고 모본왕이 있다. 왜 이들을 없는 왕처럼 대하는 것일까? 

태조왕 이전의 모본왕의 행적을 삼국사기와 중국사서를 비교해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 二年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본왕이 한나라를 공격한 기록이다. 이는 중국 사서에도 나온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한국 주류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르면 이 기록은 김부식(1075-1151)이 창작한 것이 되지만 [후한서]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점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이론부터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출처 : http://blog.daum.net/yykpeh/12190704

 "(광무제) 25년(서기 49)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후한서 광무제본기)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는  '고구려'가 '요동 변방의 맥인'으로 적혀 있다.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했다라는 내용이  '불러 항복시켰다'고 바뀌었을뿐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광무제 건무) 25년 봄,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였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이를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招之, 皆復款塞。《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條에도 나온다. 

당시 고구려는 기마부대를 북중국 여러 곳에 보내 공격함으로써 후한의 혼을 빼놓았다. 요동태수의 ‘은혜와 신의’는 막대한 금전을 뜻한다. 정복군주로서의 모본왕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전쟁기록인데 이를 없는 역사로 보고 있다.

김부식이 [후한서]를 보고 썼는지 그때까지 전하던 [구삼국사]를 비롯한 삼국의 고대사서를 보고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김부식이 이 구절을 창작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모본왕의 뒤를 이은 태조는,  모본왕이 점령한 지역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을 대비하였다 "AD55년, 태조대왕은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에 대비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요서10성 기록은 '삼국사기'와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만 기록되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삼국사기에선 자세한 위치설명이 없고 환단고기에는 위치설명이 있다.

1. 안시(安市)성이니 개평부의 동북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2.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덜어진 곳에 있고
3. 건안(建安)은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4. 건흥(建興)은 난하의 서쪽에
5. 요동(遼東)은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6. 풍성(豊城)은 안시성의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7. 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8. 옥전보(玉田堡)는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9.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곳에 있고
10. 요택(遼澤)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모본왕의 정복활동과 태조왕의 요서 10성 축성은 연결되는 사건이다. 이를 단절시켜 태조왕부터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성,합리성이 없는 주장이다. 왜 지금까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가? 

일제 관변학자 쓰다 소우키치(사진)가 6대 태조왕만을 사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국사교과서]가 태조왕을 고구려 시조와 같이 보는 것은  쓰다 소우키치의 주장을 지금껏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조대왕 이전의 국왕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 ” ......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는 궁(태조대왕 재위 53~146) 이전의 국왕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고 궁이 도(또는 추)의 가계에 속하는 것인지의 여부도 불명하다. 대체로 (고구려본기는) 이런 것이다.   - 쓰다소우키치 삼국사기 고구려기의 비판 - 

모본왕 때의 일을 인정하면 고구려가 지금의 북경부근과 태원지역까지 진출했던 강력한 고대국가가 되므로 부인한 것이다. 

다시한번 금성교과서를 들여다보자.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이후 ,백제에서는 3세기 고이왕이후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에서는 4세기 내물왕부터.. (금성교과서 중학교판)

고구려는 태조왕이후에 왕위가 세습되기 시작했다?  과거 국사 교과서에서는 9대 고국천왕 때에서야 부자상속이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49쪽 

고구려는 개국한 지 2백여 년 후인 고국천왕 때에야 비로소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다는 서술이다. 6대 태조왕이후에야 왕위 세습이 시작되었다는 말 또한 맞을까? 거짓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타난 왕위계승 기사를 보자. 

2대 유리명왕-주몽의 맏아들.
3대 대무신왕-유리왕의 셋째 아들.
4대 민중왕-대무신왕의 아우다. 대무신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 그를 세우게 하였다.
5대 모본왕-대무신왕의 맏아들.
6대 태조대왕-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여사람. 

모본왕이 세상을 떠나자(두로에게 살해) 태자가 불초해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궁을 맞이하여 왕위를 잇게 하고 임금으로 세웠던 것이다.

고구려 왕위 계승은 개국 당시부터 부자상속이었다! 물론 중간에 아들이 너무 어리거나 정변이 일어났을 경우 다른 왕족이 계승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왜 10대 고국천왕 때에 부자상속이 처음있었던 것처럼 강조한 것일까?  왜 6대 태조왕때 왕위 세습이 되었다는 요상한 소리를 하는가? 이 임나일본부설을 관철시키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일제 관변학자들이 만든 이론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2년 국사 교과서까지는 부록의 고구려 연대표에서 태조왕 이전은 재위연대가 빠져 있다. 연대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실존하는 왕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후에는 재위연대가 들어가게 되는데 이또한 역사학계가 추가한 것이 아니라 교육부의 항의에 의해서 추가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암기과목이 되고 한국사가 재미가 없는 것이다. 주몽에서 유리왕 그리고 대무신왕의 낙랑국 정복 등 얼마나 많은 스토리들이 있었던 그 시기를 깡끄리 밀어버리고 나니 산발적으로 외워야 하는 왕들과 행적만 남아 있는 것이다. 

고구려사는 다물되어야 한다. 역사속에서 옛 땅을 따서 되물리자는 것이 다물 활동이지만 현재의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회복해야하는 이를 회복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다물 사명이 남아 있다. 

<참고 자료>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 아침,이덕일 저)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안경전 역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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