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용득 묘지명 (1768년 영조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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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익운이 8살에 죽은 어린 동생 용득을 기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심익운은 동생 용득이 두창으로 죽은 1761년 이후 연이어 많은 가족을 잃었다.
용득이 죽은 이듬해에 다섯살 난 딸을 잃고 이듬해에는 누이를 잃었다. 1764년에는 동생의 부인이 두창으로 죽었고 그 2년후에는 아내가, 다시 2년 후인 1768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했다.
이 묘지명에는 어린 나이에 두창으로 죽은 동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과 7년 사이에 연이어 많은 가족을 잃은 심익운의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심익운은 용득이 죽었을 때 천마디에 달하는 지문을 지었지만 미처 돌에 새기지 못했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막냇동생의 묘지명을 새로 기록하였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 조선, 역병에 맞서다 묘지명 설명글 중
심익운(沈翼雲)은 조선후기 이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59년(영조 35)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이조좌랑·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을 때 모역에 걸린 고조부 심익창(沈益昌)의 후손이라 하여, 청환직(淸宦職)에 서임될 수 없다는 소론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760년 예조판서 정휘량(鄭翬良)이 심일진의 모자가 신주파양(神主罷養) 관계로 단자(單子)한 사건과, 심익운이 손가락을 자른 것은 패륜행위라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1776년 대사헌 박상로(朴相老)의 탄핵을 받아 결국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심익창의 손자인 심사순(沈師純)에게 심일진이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심익운은 모든 난(亂)의 시초가 3적(賊), 즉 향당(鄕黨)·주군(州郡)·조정(朝廷)에 있고, 모두가 이익만 탐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하였다. 또, 나라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군주와 경대부가 검소하고 부유한 자들이 절용해야 하며, 토지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지환 youcontent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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