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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규의 「잊혀진 영웅들」 '나석주' 편격전의 독립운동 시기, 그 한복판에 태어난 소년, 꺼져가던 민족혼에 다시 불을 지르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 나석주 선생의 순국 직전 외침 -

 

1907년 황해도 안악에 설립된 초등교육기관인 양산학교.
이 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취임하였고 그로 인해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년들이 이 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나석주 열사의 동상

이곳에서 한문을 배우고 독립정신을 교육받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석주입니다.
어릴 적부터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자라면서 몸과 마음이 독립투사로 키워졌던 이 소년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선생을 포함한 6명의 소년들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부자 최병항 선생의 집에 밤늦게 찾아갔습니다.

어린 소년들이 생각하기에 부자이기에 그들의 돈을 뺏으면 크게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돈을 뺏으러 간 강도들이 하는 행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복면을 한 6인조의 도둑들이 일제히 절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희는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왔습니다!”

최병항 선생은 말뜻을 바로 알아챘으나 한참을 고민한 뒤 말했습니다.

“너.. 석주로구나! 그렇게 복면을 쓸 필요 없다. 그래, 춘부장 어른께서는 편안하시냐?”

깜짝 놀란 6명의 소년은 복면을 벗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자 최병항 선생은 요즘 돈으로 치면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돈을 곧바로 내주었습니다. 6명의 소년은 깜짝 놀라면서도 크게 감동하여 다시 한번 큰 절을 올렸는데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석주는 주도면밀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희가 떠나면 즉시 일본 경찰에 연락하여 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
 안 그러면 군자금을 지원해준 줄 알고 선생이 위험해지십니다.”
최병항 선생은 나석주가 말한대로 행동에 옮겼고, 곧이어 신문에 나옵니다.
‘1920년 11월 22일, 6인조 강도 영구 미제사건’

군자금을 들고 어린 나석주가 향한 곳은 상하이 임시정부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릴적부터 자신의 멘토이자 은사이신 김구 선생을 찾아갔고, 이후 한인애국단, 의열단 등에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
나이 35세. 중국 산둥성 출신 마중덕.
이 중국인은 다름 아닌 청년 나석주 였습니다.
출신을 숨기고 들어온 나석주는 열차를 타고 목표장소인 서울이 아닌 평안남도 진남포로 향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별하게 된 부모님, 아내, 아들과,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어찌 이리도 슬픈 것일까요. 하필 그때 선생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가 고향 일대에 펼쳐져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게 되었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발길을 서울로 돌렸습니다.

이때 선생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죽으러 가는 길. 그 길의 마지막에 사랑하는 어머니,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열차에 오르는 모습. 그 모습속 그의 눈빛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틀 후,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는 완벽한 신분위장을 위해 중국인 전용여관 ‘동춘여관’에 투숙을 합니다.
당시 조국의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은 후 마지막으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동포들의 표정과 조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몇 분 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달려 들어가 폭탄을 던집니다.

그러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불발’

절망적인 생각과 수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그 때 나석주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다행이도 일본인들이 아직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나석주는 태연하게 연기하며 걸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재빨리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달려갑니다.

이때 선생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으며 어쩌면 실패할 뻔 했던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는 생각과 ‘바보같은 일본인들!' 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죽을 마지막 장소를 아는 사람, 조국을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과 동포들을 위해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 동양척식회사를 들어가자마자 나석주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1층에서 일본인 1명 사살, 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 다른 일본인 사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도망가는 일본인을 추가 사살. ‘토지부’ 간부들을 2층에서 집어던져버리고 기술실로 뛰어가 폭탄 1개를 던진 후 재빨리 1층으로 내려와 2명의 일본인을 추가 사살.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속에 나석주는 성공적으로 건물 밖으로 나와 자신이 던진 폭탄의 폭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 운명의 장난이 찾아옵니다.

다시 ‘불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시야가 노랗게 보였습니다.
지금의 을지로1가 쪽에서 나석주를 잡으러 달려온 일본 경찰을 쏘아 쓰러뜨려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을지로2가에까지 이르렀을 때 일본 경찰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져 있었고
나석주는 그 일대에 운집한 사람들과 일본 경찰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선생은 현장에서 세 발을 더 쏘아 일본 경찰과 일본 경감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한 뒤 마지막 남은 한 발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자신을 향해 쏘았습니다.
깊은 여운이 남는 나석주 의사의 일대기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약 폭탄이 불발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혹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의 의거가 실패였다고 평가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가 불타올랐으며 수많은 일본 군경이 부지불식간에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근심 속에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나석주 열사 관련 기사

당시 1920년대는 3.1운동 이후 무력과 강압만으로는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일본이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식민정책을 펼치던 시기입니다. 특히 실질적으로는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고 민족의 단결을 억제하며 독립운동을 막으려던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나석주 의사의 투혼은 일본의 친일유도정책에 큰 저항이 되었음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성공’ 이었습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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